
1990년대에 미국은 강력한 암호 기술을 '군수품'으로 분류했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암호화 소프트웨어를 국외로 내보내는 것을, 미사일 부품을 수출하는 것과 같은 잣대로 규제한 것이지요. 이른바 '암호 전쟁(Crypto Wars)'입니다.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적국이 미국이 풀지 못하는 통신을 갖게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지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강력한 암호는 국경 밖에서 오히려 더 빠르게 자라났습니다.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독자적인 암호 라이브러리가 쏟아졌고, 필 짐머만(Phil Zimmermann)의 PGP는 책으로 인쇄되어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통제는 사실상 무력해졌고, 미국은 규제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풀어야 했습니다. 자물쇠를 굳게 잠글수록, 상대는 스스로 열쇠를 깎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2026년 6월 30일, 저는 CNBC의 한 기사를 읽으며 이 오래된 역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표제는 이렇습니다. "백악관의 AI 단속이 오히려 중국 모델 개발자들에게 격차를 좁힐 시간을 열어주고 있다." 미국이 자국 AI를 지키기 위해 조인 빗장이, 정작 누구의 발목을 먼저 붙잡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지요.
▸ 2주간 멈춰 선 프런티어 : 규제가 먼저 묶은 것은 자국 랩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강화된 수출통제 지시의 여파로 앤트로픽(Anthropic)의 최신 프런티어 모델 공개가 약 2주간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백악관은 이 모델을 일부 기업과 연방기관에 한해서만 공개하도록 허용했지요. 앤트로픽의 제품군에는 이미 오퍼스(Opus) 4.8, 소네트(Sonnet) 5, 페이블(Fable) 5 같은 모델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가장 앞선 모델의 발걸음이 규제의 문턱에 걸린 셈입니다.
여기에 첫 번째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중국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설계된 통제가, 실제로는 미국 랩의 출시 일정을 먼저 붙잡았다는 점입니다. 규제는 국경 안의 기업에 즉시 효력을 발휘하지만, 국경 밖의 경쟁자에게는 시간을 두고 우회할 여지를 남깁니다. 통제의 칼날이 언제나 가장 가까운 손을 먼저 벤다는 것은, 기술 규제사가 반복해 가르쳐온 교훈이지요.
▸ 열린 틈으로 걸어 들어온 GLM : 오픈웨이트라는 변수
그 사이 중국에서는 즈푸(Zhipu)가 오픈웨이트(open-weight) 모델 GLM 5.2를 공개했습니다. 연구자들의 인용을 종합하면, 이 모델은 일부 사이버 보안 벤치마크에서 미국 최상위 랩과 대등한 수준을 보였다고 '주장'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주장'이라는 단어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특정 벤치마크의 한 지표에서 대등하다는 것과, 전 영역에서 프런티어를 따라잡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숫자는 틀리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오픈웨이트 모델은 칩 수출통제나 API 접근 차단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가중치(weight) 파일이 한번 공개되면, 그것은 1990년대 책으로 인쇄되어 국경을 넘던 PGP처럼 자유롭게 복제되고 퍼집니다.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첨단 반도체와 폐쇄형 모델의 접근권이지, 이미 세상에 풀린 오픈웨이트의 확산이 아닙니다.
이 배경에는 지난봄의 긴장이 깔려 있습니다. 2026년 4월, 백악관은 중국이 "고의적이고 산업 규모의 캠페인"으로 미국 AI 모델을 절취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디스틸레이션(distillation), 즉 남의 모델 응답을 대량으로 수집해 비슷한 모델을 값싸게 빚어내는 행위에 대한 경고였지요. 통제 강화는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다만 상대가 폐쇄형 복제에서 오픈웨이트 자체 개발로 무게를 옮기고 있다면, 통제의 표적과 현실 사이에는 점점 어긋남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 불가피함과 실효성 사이 : 통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 발 물러서 보면, 저는 이 문제를 어느 한쪽으로 단순하게 재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통제를 옹호하는 쪽의 논리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첨단 AI가 사이버 공격이나 생물학적 위협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면, 그 확산 속도를 늦추는 일은 국가안보의 정당한 책무입니다. 엔비디아(Nvidia)와 AMD의 최첨단 AI 칩에 대한 대중국 수출통제가 수년째 이어지는 것도, 하드웨어라는 병목만큼은 여전히 유효한 통제 지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반대편의 우려도 만만치 않습니다. 통제가 촘촘해질수록 미국 기업의 상업적 손실은 커지고, 상대는 자립의 동기를 더 강하게 부여받습니다. 실제로 워싱턴은 2026년 말 이른바 '50% 룰' 유예와 H200 칩의 수출 허용 만료를 앞두고, 이 완화 조치를 관례로 굳힐지 예외로 되돌릴지를 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알자지라(Al Jazeera)는 미국의 칩 금수가 중국 본토 밖의 중국계 기업에까지 적용된다고 전했는데, 그물을 넓힐수록 그 그물에 함께 걸리는 우방과 중립국의 불만도 커집니다. 통제의 실효성은 언제나 '얼마나 촘촘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우회당하지 않는가'로 판정되지요.
▸ 한국이 선 자리 : 빗장의 안쪽도 바깥쪽도 아닌 곳
이 국면을 한국의 시선으로 옮겨보면, 우리는 꽤 미묘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미국의 칩·모델 공급망에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이웃해 있습니다. 미국의 통제가 역외로 확장될 때마다 한국 기업의 계약과 조달은 직접 영향을 받습니다. 남의 규제 리듬에 우리의 사업 계획이 흔들리지 않도록, 공급망의 대안을 미리 그려두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둘째, GLM 같은 오픈웨이트 모델은 한국 기업에게 분명한 실익을 줍니다. 값싸고, 자체 서버에 올려 데이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그늘도 있습니다. 출처가 불투명한 가중치를 핵심 업무에 올리는 것은 보안과 라이선스, 그리고 지정학적 리스크를 함께 들이는 일입니다.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고르기에는, 따져야 할 것이 적지 않지요.
▸ 확산되는 것은 빗장으로 막히지 않는다
여러분, 암호 전쟁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암호는 결국 세상 어디에나 퍼졌고, 오늘 우리가 은행 앱을 안심하고 쓰는 것도 그 확산의 결과입니다. 통제가 완전히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확산되는 성질을 가진 기술 앞에서, 빗장은 시간을 벌어줄 뿐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담담한 결론이었습니다.
2026년 여름, AI를 둘러싼 빗장이 다시 굵어지고 있습니다. 그 빗장이 미국에게 얼마의 시간을 벌어줄지, 그 시간 동안 중국이 얼마나 열쇠를 깎아낼지는 아직 아무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한국의 정책과 기업에 이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는 남이 세운 빗장의 안쪽에 서려 하는가, 바깥쪽에 서려 하는가, 아니면 그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을 우리만의 열쇠를 깎고 있는가. 그 답을 스스로 정해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남의 자물쇠 소리에 놀라 뒤늦게 움직이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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