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영국·프랑스·러시아가 맺은 삼국 협상(Triple Entente)은 그 세 나라가 서로를 좋아했기 때문에 성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림 전쟁에서 서로 총을 겨눴던 세 나라, 식민지 경쟁에서 내내 치고받던 세 나라가 왜 한 테이블에 앉았을까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독일 제국이라는 외부의 공통 압력이 그들의 적개심보다 커졌기 때문이었지요. 19세기 말 영국 외교관 팔머스턴 경의 유명한 문장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영국에는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2026년 4월 7일,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재팬타임스(Japan Times)가 한 장의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표제는 간결했습니다. "OpenAI·Anthropic·Google, Form United Front Against Chinese Model Copying." 지난 3년간 한 번도 같은 편에 선 적이 없던 세 회사가, 중국 AI의 추격을 두고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보도였지요.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며 팔머스턴의 문장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 삼국 협상의 현대판 : 무엇이 그들을 한 줄에 세웠는가
이 '공동 전선'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두 달의 사건을 먼저 복기해야 합니다. 2026년 2월, 앤트로픽(Anthropic)은 딥씨크(DeepSeek)·문샷 AIMoonshot AI·미니맥스(MiniMax)를 '산업 규모의 디스틸레이션 공격(industrial-scale) distillation attack'으로 공개 고발했습니다. 디스틸레이션(distillation)이란 원래 학계에서 쓰이던 모델 압축 기법인데, 이 맥락에서는 다른 회사의 첨단 모델에 대량 질의를 날려 그 응답을 수집·학습해서 비슷한 능력의 저비용 모델을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오픈(AIOpenAI)도 이전부터 유사한 의혹을 제기해왔고, 구글(Google) 역시 자사 제미나이(Gemini)의 출력이 특정 중국 모델의 훈련 데이터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내부적으로 조사 중이라고 알려졌지요.
여기에 두 번째 축이 더해졌습니다. 미국 상무부가 2026년 1분기에 강화한 반도체 수출 통제와 AI 모델 가중치(weight)의 해외 반출 규제입니다. 정책 담당자들은 "중국의 모델이 미국 모델을 베끼고 있다"는 업계의 호소에 응답하는 형태로 규제 강도를 높였고, 그 과정에서 미국 AI 회사들의 의견을 '일관된 목소리'로 듣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까지 각자 로비하던 세 회사가, 이제는 공동 입장문을 준비하고 공동 청문회 증언을 조율하기 시작한 이유지요.
!세 개의 서로 다른 산봉우리가 하나의 구름 위로 솟아 햇빛을 나눠 받는 풍경
▸ 레시피와 맛의 경계 : 디스틸레이션이라는 회색지대
저는 이 대목에서 한 발 물러서 독자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디스틸레이션은 정말 도둑질일까요, 아니면 학습의 한 방식일까요.
요리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한 식당의 유명 셰프가 만든 파스타를 100번 먹고, 그 맛을 혀로 기억해 비슷한 파스타를 자기 식당에서 내놓는 요리사가 있다고 합시다. 이 요리사는 레시피 문서를 훔친 적이 없습니다. 셰프의 주방에 몰래 들어간 적도 없습니다. 다만 수없이 그 집 파스타를 사 먹었고, 그 경험을 자기 요리에 반영했을 뿐이지요. 이 행위를 도둑질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법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아이디어와 맛은 저작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AI 모델의 세계는 이 비유가 완전히 들어맞지 않습니다. 한 모델의 응답을 수억 건 단위로 수집해 훈련하는 행위는, 한 셰프의 요리를 100번 먹는 것과는 규모와 목적이 다릅니다. 또한 많은 AI 제공사의 이용 약관은 "출력을 경쟁 모델 훈련에 사용하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계약 위반이라는 민사상 책임은 분명히 성립할 수 있지요. 다만 이를 '절도'로 규정할 수 있는지, 국경을 넘나드는 디스틸레이션을 어떤 법으로 제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법학자들 사이의 뜨거운 논쟁입니다.
▸ 연합의 양면 : 혁신에 이로울까, 해로울까
외부 압력이 만들어낸 이 삼각편대는 기술 진보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저는 두 가지 가능성을 나란히 놓고 보는 편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울 가능성. 경쟁사들이 표준·안전·라이선스에 대한 공통 기준을 함께 만들면, 사용자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작지 않습니다. 예컨대 AI 출력물의 추적 가능성을 높이는 워터마킹 표준, 모델 카드 공개의 최소 규격, 안전 평가의 공동 벤치마크 — 이런 것들은 한 회사가 혼자 정하면 자사에 유리하게 기울기 마련이지만, 세 회사가 합의하면 그 편향이 희석됩니다. 1999년의 W3C에 마이크로소프트와 넷스케이프가 함께 앉으면서 웹이 성숙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지요.
해로울 가능성. 반대로 이 연합이 '기득권 카르텔'로 기능할 위험도 큽니다. 세 회사는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둔 거대 기업입니다. 이들의 공동 입장이 국제 규제 협상 테이블의 표준이 된다면, 비미국 스타트업과 신흥국의 AI 생태계는 더 높은 진입 장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분이 중국뿐 아니라 한국·인도·동남아의 AI 산업에도 간접 부담이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지요.
!철도 분기점에서 세 개의 철로가 하나의 노선으로 합쳐지는 교차점
▸ 한국이 읽어야 할 세 가지 지점
이 삼국 협상의 현대판을 한국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몇 가지 냉정한 함의가 나옵니다.
첫째, 우리는 이 연합에 포함된 당사자가 아닙니다. 미국의 세 회사가 만든 입장문이 곧 우리의 입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국의 입장이 곧 우리의 입장이 아닌 것과 똑같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미·중 지정학의 하위 집합으로 한국 AI 정책이 자리 잡게 됩니다.
둘째, 디스틸레이션 논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AI 스타트업 중 적지 않은 곳이 해외 대형 모델의 출력을 활용해 자사 파인튜닝 데이터를 구성해왔습니다. 이 관행이 앞으로 법적·계약적 리스크가 될 가능성을 지금부터 검토해두어야 합니다. 미국의 이용 약관이 바뀌면, 그 바뀐 약관의 효력이 국내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셋째, 연합의 표준이 국제 규제로 진화할 때 한국의 테이블 자리가 필요합니다. AAIF 같은 재단, OECD의 AI 거버넌스 위원회, UN의 글로벌 AI 논의체에서 한국의 실무 담당자가 얼마나 깊이 참여하고 있는지가 앞으로의 운신 폭을 결정합니다. 기술 주권은 GPU 5만 장의 숫자만큼이나 표준 문서 한 조항에도 담깁니다.
▸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 팔머스턴의 문장은 외교사의 오래된 격언이지만 AI 산업에도 놀랍도록 잘 들어맞습니다.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어제의 경쟁자가 오늘의 동맹이 되고, 오늘의 동맹이 내일 다시 각자의 길로 흩어질 것입니다. 이 불안정한 진자 운동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우리의 이익이 무엇인지 스스로 아는 일입니다.
2026년 4월 7일, 세 회사가 같은 줄에 섰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 주에, 저는 한국의 AI 관계자 분들께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영원한 이익은 무엇입니까. GPU의 숫자입니까, 모델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오고 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한국어·한국 문화·한국 산업의 깊이입니까. 그 답을 먼저 정하지 않은 채로 남의 연합이나 규제의 리듬에 박자를 맞추다 보면, 우리는 늘 한 박자 뒤에 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동맹도 적도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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