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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에는 한 푼도 안 붙였습니다 : 오픈라우터가 돈을 번 자리는 결제창이었습니다

토큰에는 한 푼도 안 붙였습니다 : 오픈라우터가 돈을 번 자리는 결제창이었습니다

라우터(router)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장치가 아닙니다. 들어온 것을 어디로 보낼지 정하는 장치죠. 메일을 쓰지도 않고 영상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패킷은 저쪽 회선으로, 저 패킷은 이쪽 회선으로 보내라고 결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자라나는 동안 가장 크게 번 회사는 콘텐츠를 만든 회사도, 컴퓨터를 만든 회사도 아니었습니다. 그 상자를 팔던 시스코였죠. 2000년 3월 시스코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회사가 됐습니다. 집계한 날에 따라 5,500억에서 5,800억 달러 사이로 기록이 갈리는데, 어느 쪽이든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숫자였습니다. 무엇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위를 지나가느냐가 값을 정한 셈입니다.

지난 일요일 블룸버그가 전한 소식을 읽으면서 그 얘기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결제 회사인 스트라이프(Stripe)가 AI 모델 게이트웨이 오픈라우터(OpenRouter)를 70억 달러, 우리 돈으로 9조 9,000억 원가량에 인수하기로 했다는 보도였습니다. 이후 테크크런치와 포춘이 같은 내용을 확인했고, 아직 스트라이프의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픈라우터를 안 써 보신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을 붙이면, 이 회사는 400개가 넘는 AI 모델을 하나의 API로 묶어 주는 중개 서비스입니다. OpenAI, Anthropic, 구글, DeepSeek, Qwen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계약하고 붙일 필요 없이, 주소 하나에 모델 이름만 바꿔 넣으면 됩니다. 값이 싼 쪽으로 보내든 빠른 쪽으로 보내든 선택은 쓰는 사람 몫이고요. 사용자는 800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2023년에 알렉스 아탈라와 루이 비시가 창업했는데, 아탈라는 NFT 거래소 OpenSea를 공동 창업하고 CTO를 지낸 사람입니다.

몸값이 오른 속도가 눈에 띕니다. 오픈라우터는 지난 5월 시리즈B로 1억 1,300만 달러를 유치하면서 13억 달러로 평가받았습니다. 세쿼이아, 앤드리슨 호로위츠, 멘로 벤처스, 알파벳의 캐피털G가 들어간 라운드였죠. 그로부터 석 달 만에 70억 달러가 됐으니 5.4배입니다.

그런데 저를 붙잡은 것은 배수가 아니었습니다. 아탈라가 자기 회사를 소개하며 쓴 표현이었죠. 그는 오픈라우터를 "AI를 위한 스트라이프"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하나로 만들어 주고, 한 곳에 묶이지 않게 해 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을 한 회사를 진짜 스트라이프가 사 버린 것입니다.

▸ 요금표를 열어 보면 이 회사가 어디서 벌었는지 적혀 있습니다

비유가 잘 들어맞았다는 정도로 넘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픈라우터의 공식 요금 문서를 열어 보면 두 줄이 나란히 있습니다.

하나는 모델 사용료입니다. 오픈라우터는 여기에 웃돈을 붙이지 않습니다. 문서에 적힌 표현 그대로, 각 제공사의 가격을 그대로 통과시킵니다. 마크업이 0이라는 뜻이죠. 다른 하나는 크레딧을 충전할 때 붙는 수수료입니다. 카드로 충전하면 5.5%(최소 0.80달러), 암호화폐로 충전하면 5%입니다. 직접 확보한 API 키를 얹어 쓰는 경우에도 월 한도를 넘기면 5%가 붙고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400개가 넘는 모델을 중개하면서 정작 토큰으로는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돈을 받는 자리는 결제창입니다. (크레딧을 충전해 보신 분이라면 결제 금액이 충전액보다 조금 크게 찍히는 것을 이미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픈라우터는 AI 회사의 외양을 하고 있었지만 수익 구조로 보면 처음부터 결제 회사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직하게 짚고 가겠습니다. 5.5%가 전부 오픈라우터의 몫은 아닙니다. 카드로 돈을 받는 데에도 원가가 들거든요. 스트라이프의 표준 온라인 카드 요율이 건당 2.9%에 30센트이고, 그중 상당 부분은 카드망과 카드를 발급한 은행이 가져갑니다. 오픈라우터가 챙기는 것은 그 위에 남는 몫입니다. 그래도 구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회사의 매출은 토큰이 아니라 결제 금액에 연동돼 있었고, 그 결제를 처리해 온 곳이 바로 스트라이프였습니다.

그러니 스트라이프는 AI 회사를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위층에 앉아 자기보다 높은 요율을 받아 온 회사를 산 것입니다.

어느 데이터센터의 네트워크 코어입니다. 왼쪽 아래에 놓인 시스코 캐털리스트 6500-E 같은 장비는 데이터를 만들지도 저장하지도 않고 경로만 정합니다.
어느 데이터센터의 네트워크 코어입니다. 왼쪽 아래에 놓인 시스코 캐털리스트 6500-E 같은 장비는 데이터를 만들지도 저장하지도 않고 경로만 정합니다.

*출처: Flickr / motleypixel*

▸ 70억 달러가 사는 것은 매출이 아닙니다

숫자를 하나 더 놓고 보겠습니다. 오픈라우터의 연환산 매출은 지난 7월 기준 1억 4,000만 달러 안팎으로 보도됐습니다. 3월에 5,000만 달러였다고 하니 넉 달 만에 세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인데요. 그래도 70억 달러는 그 매출의 쉰 배입니다.

이 배수를 매출로 설명하려면 무리가 따릅니다. 매출이 아니라 자리에 붙은 값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죠.

오픈라우터를 지나가는 물량은 주간 수십조 토큰 규모입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어떤 회사의 개발자가 어떤 작업에 어느 모델을 골랐는지, 값이 내렸을 때 트래픽이 며칠 만에 어디로 옮겨 갔는지가 보입니다. 벤더 발표문이 아니라 청구서로 확인되는 사실이죠. 실제로 업계가 모델 점유율을 이야기할 때 근거로 드는 순위표가 대개 이 회사의 집계입니다. 예전에 OpenAI의 가격 인하를 다룬 적이 있는데요, 그때 인하의 이유로 제가 인용했던 것도 오픈라우터 상위권이 중국계 모델로 채워졌다는 순위표였습니다. 그 순위표에 이제 주인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 집계에도 한계는 분명합니다. 오픈라우터를 지나간 물량의 통계이지 전 세계 AI 사용량의 통계가 아닙니다. 대기업들은 모델 제공사와 직접 계약하고, 그 물량은 여기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게이트웨이는 잠금이 강한 계층이 아닙니다. LiteLLM 같은 오픈소스 프록시를 직접 띄워도 되고, 모델 제공사와 바로 계약해도 됩니다. 붙였다 떼는 비용이 크지 않다는 뜻이죠. 시스코의 이야기도 결국 그렇게 끝났습니다. 라우팅은 시간이 지나며 흔한 물건이 됐고, 값을 결정하는 자리는 다른 층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니 이번 인수를 두고 스트라이프가 AI의 관문을 손에 넣었다고 말하기는 이릅니다. 아탈라가 내세운 잠금 방지라는 약속이 주인이 바뀐 뒤에도 그대로일지 역시 아직은 알 수 없고요.

다만 방향은 읽힙니다. 스트라이프는 이미 지난해 OpenAI와 함께 에이전트가 물건을 대신 사도록 하는 개방형 규격을 만들어 공개했고, ChatGPT의 즉시 결제 기능을 그 규격으로 처리해 왔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지불하는 흐름을 붙잡으려는 회사가, 소프트웨어가 지능을 사 오는 창구까지 사들인 셈입니다.

▸ 국산 모델이 통계에 잡히려면 어디에 올라가야 하는가

한국 쪽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정부가 국가대표 AI 사업으로 대형 모델을 키우고 있고, SKT의 A.X K2나 LG의 K-EXAONE 2.0처럼 공개된 모델도 나와 있습니다. 이런 모델의 성적은 대개 파라미터 수와 벤치마크 점수로 발표되죠. 그런데 세계 시장에서 얼마나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숫자는 다른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개발자가 코드 한 줄을 고쳐 모델 이름을 바꿔 넣는 자리, 바로 게이트웨이입니다.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그 목록에 없으면 애초에 후보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유통 채널의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원가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AI 서비스의 단가를 계산할 때 대부분 토큰당 얼마인지만 따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통장에서 나가는 금액에는 충전 수수료가 늘 얹혀 있죠. 어느 모델을 고르든 똑같이 붙는 5.5%가, 모델들 사이의 가격 차이보다 큰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원가표에 그 줄이 아예 없다면 비교 자체가 어긋나 있는 셈입니다.

숫자를 볼 때는 그것이 무엇을 재고 있는 숫자인지, 그리고 그 숫자를 지금 누가 집계하고 있는지까지 함께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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