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고등학교 때 학기말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손에 들어오던 것이 있습니다. 성적표입니다. 그 한 장의 종이가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꽤 냉정하게 알려주는 문서였지요. 잘 본 과목의 등급 앞에서는 우쭐해지고, 못 본 과목의 등급 앞에서는 한참을 망설이게 됩니다. 그 망설임이 결국 다음 학기의 공부 방향을 바꾸곤 했습니다.
2026년 3월, 스탠퍼드 대학의 인간중심 AI연구소(HAI): Human-Centered AI Institute가 『AI 인덱스(AI Index) 2026』를 공개했습니다. IEEE 스펙트럼(IEEE Spectrum)이 이 보고서를 표지로 삼은 것을 보고 저는 한 번 더 그 무게를 실감했습니다. 전 세계의 AI 투자 규모, 논문 수, 특허, 인재 흐름, 기업 도입률, 그리고 각국 정부의 정책 대응까지. 수백 페이지의 숫자가 한 나라의 AI 성적표를 말없이 건네줍니다.
저는 이번에도 한국 페이지를 여러 번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잘한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반가웠고, 못한 부분에서는 한참을 멈췄습니다. 그 멈춤의 시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씁니다.
▸ 잘 본 과목들 : 특허와 도입률의 숫자
먼저 기분 좋은 지표부터 이야기하지요. 한국은 AI 관련 특허 출원 건수에서 여전히 인구 대비 최상위권에 있습니다.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이 수치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제조업 현장의 AI 도입률, 특히 반도체·배터리·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공정 최적화 알고리즘을 실제로 가동하고 있는 비율에서도 한국은 상위에 이름을 올렸지요. 스탠퍼드의 집계는 이 대목에서 한국을 "실험실 수준이 아니라 생산 현장에서 AI를 쓰는 흔치 않은 경제권"으로 서술했습니다.
정부가 국가적으로 추진 중인 AI 컴퓨팅 센터와 GPU 공급 계획도 보고서에 언급되었습니다. 5만 장 규모의 GPU를 국내 기업들에게 우선 배정하겠다는 계획은 절대적인 수치로는 여전히 작지만, OECD 회원국 중 이런 국가 단위 배분 체계를 가진 나라는 손에 꼽습니다. 민간이 움직이지 않는 영역을 정부가 먼저 밀어준다는 전략은 그 자체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2026년 AI 인덱스 한국 부분이 펼쳐진 두꺼운 보고서
▸ 못 본 과목들 : 파운데이션 모델과 인재의 이름
그런데 성적표의 다른 쪽을 펼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공개된 '주목할 만한 파운데이션 모델(notable) foundation models' 목록에서 한국 기업이 주도한 모델의 비중은 여전히 한 자릿수입니다. 같은 기간 미국과 중국이 합쳐 전체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격차의 실체가 선명해집니다. 숫자가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더 가슴 아픈 지표는 인재입니다. 스탠퍼드는 이번 호에서 처음으로 "AI 연구 인재 순이동"이라는 항목을 공개했습니다. 한 나라의 AI 박사급 인력 중 그 나라에서 계속 연구하는 비율, 그리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비율을 추적한 지표입니다. 한국은 유출 비율이 OECD 평균보다 높은 편에 속했습니다. 국내에서 박사를 받은 이들이 미국·싱가포르·유럽의 연구소로 향하는 흐름이 2023년 이후 가속화되었다는 지적이 뒤따랐지요.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합니다. 인재는 돈을 따라가기 전에 '문제'를 따라갑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AI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누구와 함께 풀 수 있느냐가 그들의 선택을 좌우합니다. 한국의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되지 못하면, 한국에서 공부한 인재도 한국에 남지 않습니다.
▸ 순위표 너머의 이야기 : 버티컬의 깊이
저는 이 보고서를 읽으며 한 가지 흥미로운 전환을 보았습니다. 올해의 AI 인덱스는 '모델 규모'와 '파라미터 수' 같은 전통적인 지표의 비중을 눈에 띄게 줄였습니다. 대신 "도메인별 AI 성능"이라는 섹션이 새로 들어왔지요. 의료 진단, 법률 문서 분석, 제조 공정 예측 같은 분야에서 실제 업무 정확도가 어떻게 개선되었는지를 추적하는 항목입니다.
!각국을 상징하는 서로 다른 높이의 빛 기둥이 세워진 세계 지도
여기서 한국의 위치는 다릅니다. 특히 의료 영상 판독과 반도체 공정 이상 탐지 영역에서 한국의 모델들이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전체 지능의 총량에서는 미국·중국을 따라가기 어렵지만, 좁은 영역의 깊이에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뜻이지요. 2025년 가을에 제가 이 블로그에서 조심스럽게 적었던 "크기가 아니라 깊이"라는 방향이 숫자로 조금씩 확인되고 있는 셈입니다.
스탠퍼드의 분석가들은 이 현상을 "능력의 수직화(specialization) of capability"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전 세계의 AI 경쟁이 '누가 가장 큰 모델을 가졌나'에서 '누가 가장 깊은 영역을 가졌나'로 축을 옮기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이 진단이 맞다면, 한국의 자리는 순위표의 꼭대기는 아니어도 특정 수직 영역의 정상은 충분히 노릴 만합니다.
▸ 성적표 뒤의 질문
여러분, 성적표는 과거의 기록입니다. 과거의 기록이 미래의 예언은 아니지요. 다만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자료입니다.
2026년 AI 인덱스의 한국 페이지를 덮으며 저는 세 개의 질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여전히 모든 과목을 다 잘 보려고 욕심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잘 본 과목의 점수를 더 올릴 전략과 못 본 과목의 최소한을 끌어올릴 전략을 분리해서 세우고 있는가. 셋째, 가장 유능한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지금, 그들을 붙잡기 위한 '문제의 매력'은 충분한가.
"AI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간이 그렇지 못한 인간을 대체한다." 이 문장은 나라 단위에서도 유효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적표를 덮는다고 시험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학기는 이미 시작되어 있고, 출제 범위는 매주 바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업과 조직은 지금, 어떤 과목에 승부를 걸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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