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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이 세계를 도는 이유 : 소버린 AI, 그 찬란한 수사의 이면

젠슨 황이 세계를 도는 이유 : 소버린 AI, 그 찬란한 수사의 이면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한국 원전 수주의 계약이 체결되던 장면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대한민국이 미국, 프랑스, 일본을 누르고 아랍에미리트의 바라카 원전을 따낸 일은 한국 원자력 기술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지요. 그러나 그 쾌거의 이면에는 아픈 진실이 있었습니다. 원자로 냉각재 펌프와 계측제어 시스템, 그리고 설계 코드의 핵심이 여전히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약점이 협상 과정에서 발목을 잡자, 한국은 'Nu-Tech 2012'라는 국산화 프로젝트를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원전 건설의 전 과정을 우리 기술로 해낼 수 있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2025년의 지금, AI 분야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발표에서도, 각종 AI 세미나에서도 "소버린 AI Sovereign AI"라는 용어가 떠다닙니다. "AI에서도 원전처럼 자립해야 한다"는 구호가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이 구호를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설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엔비디아(NVIDIA)의 CEO 젠슨 황(Jensen Huang)입니다.

▸ GPU 세일즈맨의 세계 순회

2024년부터 젠슨 황은 인도,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아랍에미리트를 차례로 방문하며 동일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언어와 문화에 맞는 AI 인프라를 가져야 한다." 현지 정상과 만나고, 현지 빅테크와 공동 발표를 하며, 현지 스타트업을 격려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소버린 AI'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각국의 데이터가 해외 서버에 저장되어서는 안 되고, 각국의 문화적 맥락은 자국의 AI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메시지에는 분명한 진실이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AI는 한국의 유교 문화, 한국어 존댓말의 미묘한 계층성,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들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얼마 전 유명 생성형 AI에 "한국의 전통 의상과 건축 양식을 그려달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해본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한복 치마에 중국식 목걸이를 걸고, 기와지붕은 일본식 축소 장식이 들어간 기이한 하이브리드가 나오더군요. 이런 사례를 보면 소버린 AI의 문제의식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 생각해봅시다. 젠슨 황이 각국을 돌며 소버린 AI를 설파할 때, 가장 큰 수혜를 보는 자는 누구일까요? 각국 정부가 독자적인 AI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결심은 엔비디아 GPU의 대규모 주문으로 이어집니다. 단 한 나라가 아닌 전 세계 수십 개 나라가 이 대열에 합류한다면, 엔비디아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매출 기회를 만납니다.

저는 젠슨 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메시지에는 분명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그 진실이 역대급 GPU 세일즈 전략과 절묘하게 겹쳐 있다는 점은 우리가 냉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마케팅과 공공선이 이렇게 완벽하게 교차하는 지점을 만난 경영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원전과 AI는 같은 동물이 아니다

한국에서 소버린 AI 논의가 종종 원전 국산화 사례와 비교되곤 합니다. 저는 이 비유에 중요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원전은 물리적인 플랜트입니다. 한 번 지으면 30년에서 60년간 운용할 수 있습니다. 기술을 이전받아 국산화한 자산은 수십 년간 유효하지요. 1980년대의 국산화 노력이 2010년대까지, 어쩌면 그 이후까지 계속 열매를 맺는 구조입니다.

AI 모델은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6개월이면 세대가 바뀌고, 1년이면 아키텍처 자체가 교체됩니다. 2023년에 최첨단이던 모델이 2025년에는 오픈소스로 무료 공개되는 세상입니다. 원전의 기술 주권이 "한 번 확보하면 오래 쓰는" 성격이라면, AI의 기술 주권은 "끊임없이 따라잡아야 하는" 성격입니다. 달리는 열차 위에서 매번 다음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경주에 가깝지요. K-원전의 국산화에 20년이 넘게 걸렸다는 점을 떠올리면,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을 때 우리가 완성한 '한국산 모델'이 그 완성 시점에는 이미 세계 최전선과 큰 격차를 갖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국가대표 선발이라는 오래된 유혹

한국 정부는 AI 3대 강국 도약을 목표로 '국가대표 AI 모델' 선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선발된 모델에는 국가 차원의 집중 지원이 따르고, 2028년까지 GPU 5만 장 이상을 국내 기업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한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되었지요. 이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한국형 파운데이션 모델이 세계를 향해 발돋움한다는 그림은 그 자체로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세 가지 질문을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정부가 '승자'를 미리 고르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1980년대 일본 정부는 570억 엔을 투입해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기술 발전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면서 거대한 매몰 비용만 남았습니다. AI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분야에서 정부가 승자를 고르는 것은, 6개월 뒤 어떤 말이 1등을 할지 미리 베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AI의 돌파구가 완전히 다른 아키텍처(뉴로심볼릭 AI, 또는 우리가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새로운 접근법)에서 나올 수도 있는데, 선발된 '국가대표'가 그 돌파구의 후보가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요.

둘째, GPU 5만 장의 규모입니다. 오픈(AI)가 GPT-5 훈련에 사용한 GPU가 수만 장이고, 메타가 보유한 GPU는 수십만 장에 달합니다. 5만 장이 의미 있는 단위인지, 아니면 '국제 무대에 서기 위한 최소 입장권' 수준인지를 솔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물론 국내 민간 투자가 더해지면 숫자는 늘어나겠지만, 글로벌 빅테크의 투자 규모는 이미 국가 단위를 훨씬 넘어선 스케일입니다.

셋째, 수출 전략의 구조적 모순입니다. 중동이나 동남아에 한국형 파운데이션 모델과 데이터센터, 고성능 AI 반도체를 묶어 수출한다는 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출 전략의 기본 논리가 흥미롭습니다. "각 나라에는 자신의 AI가 필요하다"고 설파하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에는 우리의 AI를 가져다 쓰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 두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모델의 한국적 특수성이 강할수록 수출 시장에서 매력은 떨어지고, 수출 가능한 범용성을 키울수록 '왜 중국이나 미국 모델이 아닌 한국 모델이냐'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 소버린의 다른 길 : 크기가 아니라 깊이

저는 한국이 '범용 파운데이션 모델로 미국·중국과 정면 대결'하는 전략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봅니다. 이미 쿠웬(Qwen)이나 라마(Llama) 같은 강력한 오픈소스 모델이 존재하고, 그 위에 올라타서 한국적 깊이를 더하는 편이 투자 대비 효과가 훨씬 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방향을 생각해봅니다. 한국어 의료 AI — 의무기록 용어의 미묘함을 이해하고, 국내 건강보험 체계와 맞물리는 AI. 한국 법률 특화 AI — 대법원 판례의 한국어 문체를 학습한 모델. 한국형 제조 공정 최적화 AI — 반도체 공정, 배터리 생산, 조선업의 경험이 녹아든 버티컬 AI. 이런 모델들은 미국이나 중국이 쉽게 따라오기 어렵습니다. 데이터 자체가 한국에만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프랑스의 미스트랄(Mistral)이 유럽에서 한 일이 바로 이와 비슷한 전략입니다. 오픈(AI)와 정면으로 경쟁하는 대신, EU의 데이터 주권 규제와 박자를 맞추며 유럽 기업에 특화된 자리를 만들었지요. "모든 것을 다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결국 경쟁력을 갖는다는 교훈입니다.

▸ 예산의 기회비용이라는 냉정한 질문

소버린 AI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한다는 것은, 그 돈이 다른 예산에서 빠져나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초 과학 연구, 교육 인프라, 지역 균형 발전, 복지 예산 — 이 모든 것과의 기회비용을 솔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또한 AI 데이터센터가 필요로 하는 전력의 규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원전 증설 계획이나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로 이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지, 지역사회와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나갈지 — 이런 현실적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 기술 주권의 '핵심'이란 무엇인가

기술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기술 주권이 없는 기술은 비용이 되고, 핵심을 쥔 기술은 자산이 됩니다. 이 원칙은 소버린 AI 담론의 진짜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다만 그 '핵심'이 반드시 범용 파운데이션 모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만이 풀 수 있는 문제, 한국 문화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AI, 한국 산업 현장의 기술이 녹아든 쓸모 있는 AI —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쥐어야 할 '핵심'일 것입니다. 젠슨 황이 외치는 '소버린'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대신, 한국의 조건에 맞는 우리만의 문법을 세우는 일이 지금 필요합니다.

GPU 세일즈맨의 세계 순회가 남긴 질문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AI가 필요한가?"라는 당위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AI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구체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답을 외부의 목소리에 맡기지 않는 것 — 그것이 진짜 소버린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버린AI #엔비디아 #한국AI #국가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