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3월의 어느 오후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마주 앉은 네 번째 대국, 78번째 수. 백을 가르고 들어간 그 한 점이 반상에 놓이는 순간, 알파고의 계산은 무너졌습니다. 다섯 판 중 유일한 인간의 승리였고, 사람들은 그 수를 '신의 한수'라 불렀습니다.
그 장면은 묘하게도 인간이 기계에게 이긴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이후 바둑 AI는 인간이 다시는 넘볼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갔고, 프로기사들은 이제 AI를 상대가 아니라 스승으로 삼았지요. 인간과 기계의 대결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철 지난 낭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그 이야기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지난 7월 19일, 세계 랭킹 1위 신진서 9단이 현존 최강의 바둑 AI 카타고(KataGo)를 상대로 흑 4집 반승을 거뒀습니다. 290수까지 가는 4시간 50여 분의 접전이었고, 카타고가 공식 대국에서 인간에게 무릎을 꿇은 첫 사례였습니다.
▸ 10년이라는 격차 : 호선에서 2점 접바둑으로
먼저 냉정한 사실부터 짚고 가야겠습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는 호선, 즉 맞바둑으로 두었습니다. 서로 아무런 핸디캡 없이 대등하게 겨룬 것이지요. 이세돌은 그 조건에서 한 판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번 '쎈수학·한경 기신전'은 신진서가 흑돌 두 점을 미리 깔고 시작하는 2점 접바둑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두 수를 먼저 얹어준 판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돌·알파고 대국 1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대결이지만, 조건은 호선이 아니라 접바둑이 됐습니다. 10년 사이 벌어진 그 격차가 바로 이 판의 규칙에 새겨져 있었던 셈입니다.
카타고가 어떤 상대인지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오픈소스로 공개돼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바둑 AI이고, 국가대표 선수들의 실전 훈련과 TV 해설에 두루 동원됩니다. 이번 대국을 위해서는 그래픽카드 RTX 3090 넉 장을 병렬로 묶은 전용 시스템까지 갖췄습니다. 인간이 두 점을 깔고서야 겨우 마주 앉을 수 있는 상대, 그것이 지금의 바둑 AI입니다.
▸ 숫자는 틀리지 않았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AI를 이겼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감동을 조금 늦추고, 숫자의 맥락을 먼저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첫째, 이번 승리는 두 점을 깔고 얻은 것입니다. 호선이었다면 결과가 어땠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틀 전 7월 17일 1국에서 신진서는 두 점을 깔고도 흑 불계패를 당했습니다. 대국 초반 AI 스스로도 신진서가 18집 이상 앞서고 승률이 99%라고 봤지만, 카타고가 던진 변칙적인 수에 흔들리며 역전을 허용한 것이지요. 두 점의 우세조차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실력 차입니다.
둘째, 그 '변칙적인 수'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해설자들은 카타고의 초반 포석을 두고 "인간 바둑에 없는 수"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수천 년간 쌓아온 정석의 바깥, 아무도 가보지 않은 자리에 기계가 돌을 놓았다는 뜻입니다. 신진서를 흔든 것은 계산 속도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 지도에 존재하지 않던 낯선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승리는 '인간이 기계를 눌렀다'기보다, 인간이 기계가 열어놓은 낯선 세계에서 자기 길을 하나 찾아냈다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신진서 본인도 승리의 결정적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더 참으면 바둑이 미세해지겠다 싶었다. 그래서 결행했다." 계산이 아니라 판단이었고, 속도가 아니라 인내였습니다.
▸ 카타고가 키운 신진서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을 짚고 싶습니다. 신진서를 오늘의 세계 1위로 만든 훈련 파트너가 다름 아닌 카타고였다는 사실입니다.
알파고 이후 10년, 프로기사들의 공부 방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최고의 기사들은 AI가 제시하는 수를 매일 복기하며 자신의 감각을 다듬습니다. 신진서가 카타고의 변칙에 맞서 던진 한 수 역시, 수많은 밤을 AI와 마주하며 길러낸 직관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를 벼랑까지 몰아세운 것도 AI였고, 그를 그 벼랑에서 버티게 한 힘을 길러준 것도 AI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제가 늘 되뇌는 문장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지 않지만, AI를 잘 다루는 인간이 그렇지 못한 인간을 대체합니다. 반상 위 신진서의 자리는, AI를 스승 삼아 자기 것을 만든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둑이 유독 한국에서 뜨거운 종목이라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세돌에서 신진서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AI 시대에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기계와 함께 강해질 수 있는지를 두고 우리가 먼저 겪고 있는 실험이기도 하니까요.
최종 3국은 오는 7월 21일에 열립니다. 매치는 1승 1패, 승패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그 결과 자체보다, 신진서가 두 점을 깔고 앉아 낯선 수 앞에서 버티고 판단하는 그 모습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기계가 답을 쏟아내는 시대에, 끝까지 자기 질문을 놓지 않는 인간의 얼굴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그 반상에서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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