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을 넘는 물건에는 도장이 두 개 필요합니다. 파는 나라가 내주는 수출 허가, 그리고 사는 나라가 내주는 수입 허가죠. 평소에는 뒤엣것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겠다는 쪽이 굳이 못 사게 막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지난 몇 년 동안 AI 반도체를 두고 우리가 던진 질문도 늘 앞엣것이었습니다. 미국이 팔게 해 줄까. 어느 사양까지 허용할까. 규정이 또 언제 바뀔까.
현지 시각 8월 19일 파이낸셜타임스가 전한 소식은 그 질문의 방향을 바꿔 놓습니다. 엔비디아의 H200이 드디어 중국 본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들어간 양이 문제입니다. 바이트댄스와 텐센트가 최근 몇 주 사이에 받은 물량이 각각 1만 장 안팎입니다.
미국이 승인한 상한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지난 5월 미국 상무부는 알리바바·텐센트·바이트댄스·JD닷컴을 포함한 열 곳 남짓의 중국 기업에 H200 구매를 승인했습니다. 구매 상한은 회사당 최대 7만 5,000장이었고요(매체에 따라 10만 장으로 전하기도 합니다). 유통은 레노버와 폭스콘이 맡습니다. 조건은 까다롭습니다. 군사 목적 금지, 보안 절차 입증, 엔비디아가 미국 내 재고를 충분히 남겨 뒀다는 증명, 그리고 판매 대금의 25%를 미국 정부에 내는 것. 칩은 미국 영토를 한 번 거쳐 검사와 인증을 받은 뒤에야 중국으로 갑니다. 미국 법이 수출품에 세금을 직접 매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우회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파는 쪽 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7만 5,000장을 승인했는데 1만 장이 들어갔습니다. 남은 물량을 막고 있는 것은 워싱턴이 아닙니다.
▸ 이번에 손잡이를 쥔 쪽은 사는 나라입니다
문을 잠갔던 쪽은 베이징이었습니다. 지난 1월, 미국이 수출을 승인한 지 하루 만에 중국 세관에 H200을 들이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갔습니다. 그때 중국 기업들이 이미 넣어 둔 주문은 200만 장이 넘었고, 알리바바와 바이트댄스는 각각 20만 장 이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 엔비디아 협력사들이 H200용 부품 생산을 멈췄고, 3월에는 생산 자체가 중단됐죠. 지금도 엔비디아 창고에는 중국 고객용으로 만들어 둔 H200이 50만 장가량 쌓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문을 조금 연 것도 같은 쪽입니다. 다만 여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구매 한 건마다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별도 승인을 받아야 하고요. 규제 당국은 기업들에게 물량 상당 부분을 홍콩으로 보내 홍콩에서 쓰라고 안내했습니다. 홍콩은 본토 관세영역 밖이거든요. 칩은 중국 기업이 쓰되 중국 땅에는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홍콩의 데이터센터 용량과 전력이 넉넉하지 않아서 실제로 얼마나 돌릴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이유는 안보 쪽이 아니라 산업정책 쪽에 있습니다. 지난해 중국 AI 가속기 카드 시장에서 중국산 제품의 출하량이 165만 장, 점유율 41%를 기록해 처음으로 40%를 넘겼습니다. 화웨이의 어센드(Ascend) 계열이 81만 2,000장으로 국산 진영을 이끌었고요. 카드 대수 기준이라 연산 성능 총량의 점유율은 아니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H200이 제한 없이 들어오면 그 41%는 도로 내려갑니다.
수요를 남겨 둬야 국산 칩이 자랍니다. 베이징이 쥔 손잡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출 허가를 무기로 보는 데 익숙했는데, 수입 허가도 똑같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드러난 셈이죠. 게다가 이쪽 무기는 상대를 깎는 대신 자기 산업을 직접 키웁니다.
▸ 한국은 문을 열어 둔 채 우대만 얹었습니다
같은 주에 한국에서도 성격이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8월 1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리벨리온의 아톰맥스(ATOM-Max) 카드와 서버, 딥엑스의 DX-M1·DX-H1 시리즈를 '우수연구개발 혁신제품'으로 지정했습니다. 공공기관이 경쟁입찰 없이 수의계약으로 살 수 있고, 조달에 걸리던 60일이 10일 이하로 줄고, 구매 담당자에게는 구매면책이 적용됩니다. 지정 효력은 3년, 연장하면 최대 6년이고요.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는 이번 지정으로 공공 확산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려는 방향은 중국과 같은데 잡은 손잡이가 다릅니다. 중국은 수입 문을 좁혀 국산 칩이 들어갈 자리를 강제로 남기고, 한국은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국산 쪽에 우대만 얹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도입하기로 한 엔비디아 GPU가 26만 장 규모니까요.
그런데 그 우대가 어디서 걸리는지를 지난달 한 기사가 짚었습니다. 공공 AI 인프라 발주서에 'GPU 서버', 'GPU 기반 인프라'라고 아예 못 박혀 나오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3월 한국인터넷진흥원의 51억 7,900만 원짜리 사업은 제목부터 'AI 기반 침해대응체계 구축을 위한 GPU 서버 도입'이었고, 5월의 한 연구원 사업은 엔비디아의 특정 지포스 모델명을 규격에 직접 적어 넣었습니다. 업계에서는 국산 NPU가 가격이나 성능으로 겨루기 전에 가속기 선택 단계에서 후보에서 빠진다고 말합니다.
수의계약을 열어 줘도 발주서에 GPU라고 적혀 있으면 그 문 앞까지 가지를 못합니다.
▸ 벤치마크 표 앞에 종이가 한 장 더 놓였습니다
여기서 엔지니어에게 남는 것은 조금 낯선 습관입니다. 어떤 가속기를 쓸지가 벤치마크 표에서 정해지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그 앞에 수입 허가서와 발주서라는 종이가 한 장씩 더 놓입니다. 성능이 같아도 도장이 없으면 못 쓰고, 성능이 조금 모자라도 도장이 있으면 씁니다. (저도 사양 비교표를 먼저 열어 보는 쪽이라, 이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이 방식에는 값이 따릅니다. 수요를 정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당분간 덜 좋은 칩으로 버티는 기간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니까요. 중국은 그 값을 치르기로 한 것으로 보이고, 한국은 치를지 말지를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로 보입니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몇 년 뒤에나 알 수 있겠죠. 다만 발주서에 무엇을 적을지는 지금 정해지고 있으니, 그 한 줄을 누가 쓰고 있는지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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