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보신 분들은 입구에서 밟는 절차를 기억하실 겁니다. 휴대폰 카메라에 스티커를 붙이고, 노트북은 아예 두고 들어가지요. 안에서 무엇을 보든 그 정보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그 절차가 서 있습니다. 설계 도면과 공정 조건, 수율 데이터는 그 회사가 가진 자산 가운데 바깥으로 내보내기가 가장 어려운 것들이거든요.
현지 시각 9월 8일 파리에서 나온 발표는 그 전제와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프랑스의 미스트랄(Mistral AI)이 30억 유로 규모의 시리즈 D를 마감했다고 밝혔습니다. 사후 기업가치는 210억 유로를 넘었고, 회사는 이것이 유럽 기술기업이 완료한 사상 최대 규모의 지분 조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23년 4월에 창업한 회사가 3년 남짓 만에 닿은 숫자입니다.
▸ 두 라운드를 이끈 곳이 모두 장비·반도체 회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발표에서 금액보다 명단 첫 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라운드를 이끈 곳이 삼성전자입니다. 공동 리드는 EQT가 운용하는 Scaleup Europe Fund와 기존 투자자 PSG Equity였고, 어드벤트(Advent)와 블랙록이 운용하는 펀드,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신규 투자자로 들어왔습니다.
작년 이맘때와 나란히 놓으면 그림이 더 뚜렷해집니다. 2025년 9월 9일에 발표된 직전 라운드, 17억 유로 규모의 시리즈 C를 이끈 곳은 ASML이었습니다. 노광장비 회사죠. ASML은 그 라운드에 13억 유로를 넣어 완전희석 기준 약 11%의 지분을 가져갔고, 같은 날 자사 제품군과 연구·개발·운영 전반에 미스트랄의 모델을 쓰는 방안을 검토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리드 투자와 사내 도입 발표를 같은 날 묶어 내놓은 순서가 이번 삼성 건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1년 사이 유럽 최대 AI 회사의 두 라운드를 이끈 곳이 둘 다 소프트웨어 투자자가 아니라 장비와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였고, 둘 다 돈을 넣으면서 동시에 자기 공정에 그 모델을 쓰겠다고 밝힌 셈입니다. 미스트랄이 공개한 기업 고객 예시가 에어버스와 ASML, HSBC이니 ASML은 투자자 명단과 고객 명단에 동시에 올라 있죠. 엔비디아도 기존 투자자이면서 파리 남쪽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GPU를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그리고 고객 명단에 오른 HSBC는, 그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 쓴 8억 3,000만 달러 부채를 함께 댄 은행 일곱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 데이터가 나갈 수 없으면 모델이 들어와야 합니다
왜 이런 구성이 되었는지는 삼성이 같은 날 낸 파트너십 발표문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반도체 칩 설계와 제조, 공정 최적화, 엔지니어링 워크플로에 Mistral Large를 비롯한 미스트랄의 모델을 도입한다는 내용인데요. 미스트랄의 AI 플랫폼이 반도체를 설계하고 만드는 방식을 바꿀 도구 묶음을 삼성에 제공할 것이라고 적혀 있고, 적용 지점으로는 결함 검출과 장비 최적화, 목표로는 개발 주기 단축과 제조 정밀도, 수율 안정화가 함께 제시됐습니다. 조건이 하나 분명히 명시돼 있습니다. 온프레미스(on-premises)로 두어, 민감한 기술과 운영 데이터를 삼성 반도체 인프라의 경계 안에서 전부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적용 범위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로직을 포함한 DS부문 전반입니다. 삼성전자 DS부문장인 전영현 부회장은 "AI 칩 설계와 제조에 수반되는 복잡성이 커지면서 반도체 기술의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합니다"라고 했고, 미스트랄 공동창업자 겸 CEO인 아르튀르 멘슈는 "AI는 실리콘에서 소프트웨어까지, 우리가 복잡한 기술을 만드는 방식을 다시 짜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첫 문단으로 돌아가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입구에서 카메라를 막는 회사가 모델을 쓰려면 그 모델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API 엔드포인트만 파는 회사가 구조적으로 팔기 어려운 물건입니다.
숫자 하나는 짚고 가야겠습니다. 30억 유로는 라운드 전체 규모이고, 삼성전자가 그중 얼마를 넣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리드 투자자라는 말은 가장 많이 넣었다는 뜻이지 전부 넣었다는 뜻이 아니어서, 삼성이 30억 유로를 투자했다고 읽으면 사실과 어긋납니다. 작년에 ASML이 13억 유로에 약 11%라고 지분율까지 밝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 수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라운드가 마감되기 전인 7월에 삼성이 최대 10억 유로 선에서 협의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 팔리는 것은 서버실에 올려 둔 모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미스트랄 자신이 먼저 붙여 둔 조건이 있습니다. 한 달쯤 전 인터뷰에서 미스트랄 CTO인 티모테 라크루아는, 모델이 1조 파라미터 이상으로 커지면 기업이 자체적으로 온프레미스 호스팅을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습니다. 온프레미스를 파는 회사의 최고기술책임자가 온프레미스의 한계를 먼저 짚은 셈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자기 용량을 짓고 있습니다. 2027년 말까지 200메가와트, 2030년 말까지 1기가와트가 목표인데요, 지금 가동 중인 전력 용량은 200메가와트에 못 미칩니다. 지금까지 확보된 시설은 파리 근교 44메가와트, 스웨덴 23메가와트, 레쥘리(Les Ulis) 10메가와트입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라크루아가 한 다른 말이 이 투자의 성격을 더 정확히 알려줍니다. 미스트랄이 파는 전용 연산 용량의 핵심은 약정이고, 고객이 5년 정도, 적어도 긴 기간 약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arl Lender*
그러면 실제로 거래되는 물건이 무엇인지 뚜렷해집니다. 대부분의 기업에게 그것은 자기 서버실에 올려 둔 모델이 아니라, 자기 관할권 안에 있는 5년짜리 약정 용량일 것입니다. 미스트랄이 이번에 정리해 내놓은 주권의 네 가지 조건, 즉 조직 경계 안에 머무는 데이터, 통제할 수 있고 맞춤이 가능한 모델, 외부와 섞이지 않고 예측 가능한 연산 자원, 완전히 통제하고 감사할 수 있는 운영 시스템 가운데 뒤의 두 개는 기술 사양이라기보다 장기 임대 계약서에 들어가는 항목에 가깝습니다.
▸ 고객이 투자자일 때 흐려지는 것
물론 위험도 같이 봐야 합니다. 고객이 투자자이면 바깥에서는 수요 신호가 흐려집니다. 늘어난 것이 매출인지 주주의 지출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거든요. 210억 유로라는 기업가치도 지난 2월에 보도된 연간 반복 매출 4억 달러대와 견주면 상당한 배수입니다. 회사가 함께 제시한 연말 목표치 10억 달러를 대신 넣어 계산해도 배수는 여전히 큽니다. 삼성과의 협력 역시 아직 발표 단계여서, 실제 공정 데이터로 모델을 돌린 결과는 하나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발표가 나온 자리도 감안해서 읽어야 합니다. 삼성과 미스트랄이 서명한 문서는 계약이 아니라 양해각서이고, 서명은 파리 엘리제궁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뤄졌습니다. 한불 수교 140주년에 맞춘 국빈 방문 일정의 일부였고, 같은 날 양국은 AI와 반도체, 방산과 우주를 포함해 16건의 협력 문건을 채택했습니다. 그 가운데 9건이 두 정상 임석 하에 서명됐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라운드가 프랑스와 한국이 함께 AI의 제3의 길을 만들려는 목표를 보여준다고 했는데요, 양해각서 자체에는 구속력이 없습니다. 지금 확인된 것은 지분과 서명이고 결과는 그다음의 일입니다.
그래도 이 라운드가 정리해 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유럽 AI의 최대 후원자가 유럽의 소프트웨어 투자자가 아니라, 자기 공장 데이터를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제조업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우리 조직도 머지않아 같은 질문을 받게 되겠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경계 안에 머무는 데이터인지, 아니면 지도 위에서 가리킬 수 있는 경계인지. 두 답은 아키텍처도 다르고 청구서도 다릅니다. 고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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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이미지: 네덜란드 펠트호번의 ASML 본사 — Wikimedia Commons, A ans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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