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웹을 여는 창은 사실상 하나였습니다.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시장의 열에 아홉이 이 브라우저로 인터넷을 봤지요.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에 공짜로 끼워 넣기 시작하면서 판이 뒤집힙니다. 더 나은 브라우저를 만들어 이긴 게 아니었습니다. 운영체제를 쥔 쪽이 "기본값(default)"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지요.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에서 돌았다고 알려진 전략은 세 단어로 요약됩니다. 끌어안고(embrace), 확장하고(extend), 소멸시킨다(extinguish). 남이 만든 표준을 일단 지지하는 척 받아들인 뒤, 자기만의 확장을 슬쩍 얹고, 종국에는 원조를 밀어내는 방식입니다. 2000년대 초 넷스케이프는 사라졌고, 표준을 먼저 세운 자가 아니라 유통 경로를 쥔 자가 웹의 문을 소유했습니다.
30년이 지난 2026년 여름, 저는 그 장면이 다시 상영되는 것을 봅니다. 이번 무대는 브라우저가 아니라 AI 에이전트입니다. 그리고 넷스케이프의 자리에 선 것은, 놀랍게도 신생 스타트업 Anthropic입니다.
이번 주, The Information이 흥미로운 보도를 내놨습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Salesforce·Snowflake·ServiceNow 같은 엔터프라이즈 강자들이 AI 에이전트를 위한 공유 백엔드 프로토콜을 함께 지원하기로 뜻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보도는 이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프레이밍합니다.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Anthropic과 OpenAI를 "밀어내기(beat back)" 위한 동맹이라고요.
▸ 배관을 쥔 자가 왕이다
사람들은 모델의 벤치마크 점수에 열광합니다. 이번 달 어느 모델이 몇 점을 더 받았는지가 매일의 화제지요. 그런데 진짜 해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에이전트가 기업의 데이터베이스에, 사내 툴에, 그리고 다른 에이전트에게 연결되는 방식. 이 "배관 층(plumbing layer)"입니다.
Anthropic은 2024년 11월 Model Context Protocol, 즉 MCP를 오픈 표준으로 공개했습니다. AI가 외부 도구와 데이터에 접속하는 규격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제안이었지요. 그리고 약 1년 반 만에, MCP는 툴 연결의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올해 들어 SDK 다운로드가 월 9,700만 회를 넘어섰다고 알려졌습니다. 특정 회사의 API가 아니라, 하나의 스타트업이 제안한 규격이 업계의 공용어가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기존 강자들이 긴장한 지점입니다. 전기 규격이 콘센트 모양을 결정하듯, 연결 표준을 쥔 쪽은 향후 10년 모든 엔터프라이즈 배포의 기본값을 정하게 됩니다. Salesforce·Snowflake·ServiceNow는 세계 기업 데이터와 업무 흐름의 상당 부분이 지나는 길목을 쥐고 있고,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길이 깔린 클라우드를 소유합니다. 이들이 남의 배관 규격을 기본값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성 안에 남이 낸 수도관을 그대로 두는 일과 같습니다. 넷스케이프가 아니라 배관이 문제인 셈이지요.
역사에는 비슷한 장면이 또 있습니다. 1980년대, 국제 위원회가 몇 년을 들여 설계한 우아한 통신 표준 OSI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인터넷을 뒤덮은 것은 현장에서 거칠게 자라난 TCP/IP였지요. 우아한 설계가 아니라 먼저 깔린 배관이 이겼습니다. 지루하고 눈에 안 띄는 연결 규격이 결국 가장 큰 권력이 된다는 것, 이것이 인프라의 오래된 진실입니다.
▸ 재단에서 손잡고 시장에서 칼을 겨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매듭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동맹으로 거론된 구글·마이크로소프트·OpenAI·Anthropic은 사실 이미 한 지붕 아래 있습니다. 2025년 12월 리눅스 재단 산하에 출범한 Agentic AI Foundation의 회원사들이거든요. 이 재단은 MCP를 비롯해 OpenAI의 Agents.md, Block의 Goose 같은 오픈 표준을 함께 관리합니다. Anthropic은 지난해 말 MCP를 이 재단에 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들은 재단에서는 손을 맞잡고 표준을 함께 관리하면서, 시장에서는 서로를 밀어내려 칼을 겨눕니다. 협력과 전쟁이 같은 얼굴 위에 겹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보도를 한쪽으로 단정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두 갈래 해석이 팽팽하거든요. 하나는 The Information의 프레이밍대로, 기존 강자들이 스타트업이 선점한 표준을 되찾으려는 반격 동맹이라는 시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Salesforce·Snowflake·ServiceNow가 이미 MCP를 지원하고 있고 핵심 프로토콜은 특정 기업이 아니라 재단이 관리하니, 이것이 새로운 대체 표준이라기보다 기존 표준 위의 거버넌스 재편에 가깝다는 반론입니다. 아직 어느 쪽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승패를 점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반격이든 재편이든, 세계에서 가장 큰 이 거인들이 힘을 모은 전장이 '모델'이 아니라 '연결 표준'이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거든요. 이것이 제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AI 시대의 권력은 벤치마크 점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배관에서 결판난다는 것 말입니다.
한 발 물러서 보면, 이 모호함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브라우저 전쟁의 세 단어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끌어안고, 확장하고, 소멸시킨다. 이 전략의 무서운 점은 첫 단계가 "협력"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재단에서 표준을 함께 관리하는 오늘의 모습과, 그 표준을 자기 클라우드에 유리하게 확장하는 내일의 모습은 겉으로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오픈 표준 거버넌스의 힘이자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문을 열어두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가장 큰 방을 가진 자가 그 문을 어떻게 쓸지는 아무도 강제하지 못합니다.
▸ 이 판의 어느 이름도 한국 것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국내 개발자와 기업으로 시선을 돌려 보겠습니다. 지난 1년 반 사이 MCP는 한국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도 사실상 표준으로 올라섰습니다. 많은 팀이 사내 에이전트를 MCP 위에 얹었고, 그 배관을 전제로 아키텍처를 설계했습니다. 편리했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동맹의 이름들을 다시 보십시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Salesforce, Snowflake, ServiceNow, OpenAI, Anthropic. 이 판의 어느 이름도 한국 것이 아닙니다. 삼성이든 네이버든 카카오든, 국내 기업의 에이전트 전략은 결국 남이 깐 배관 위에 지어집니다. 표준을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표준을 받아들이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지요. 구글의 A2A(Agent-to-Agent) 프로토콜까지 이 판의 한 축으로 들어와 있는 지금, 연결 규격의 주도권은 온전히 태평양 건너에 있습니다.
이것이 소버린 AI 논의가 모델과 반도체에서 멈추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자체 모델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그 모델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배관을 누가 쥐는지는 덜 이야기합니다. 원전을 국산화해도 송전망 규격을 남이 정하면 결국 그 규격에 종속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국산 모델이라도 연결 표준이 남의 것이면 그 위에서 셋방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MCP에서 내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표준 전쟁의 승패를 조급하게 점치기보다, 어느 규격에 올라타든 갈아탈 수 있도록 연결 층을 느슨하게 설계해 두는 것이 지금의 현실적 대비입니다. 어느 진영이 이기든 배관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 그것이 표준 수용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자세입니다.
기술의 역사는 늘 같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화려한 모델은 눈길을 끌지만, 세상을 오래 지배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배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벤치마크 점수 대신 다른 질문을 권합니다. 이번 동맹이 새 표준을 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 표준을 끌어안아 확장하려는 것인지. 이 질문의 답을 스스로 따라갈 수 있는 사람만이 표준 전쟁의 소음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결국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 유행하는 이름을 외우기만 하는 인간을 앞섭니다. 넷스케이프의 시대에도 그랬고, 배관의 시대에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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