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보면 가끔 낡은 지도 한 장이 나옵니다. 몇 년 전 여행에서 쓰던 지도에는 그때 찍어둔 핀들이 아직 꽂혀 있지요. 어떤 핀은 색이 바랬고, 어떤 핀은 여전히 선명하고, 어떤 핀은 엉뚱한 자리에 꽂혀 있어 지금 보면 피식 웃음이 납니다. 그 지도를 다시 펼치는 일은 과거의 자신을 예의 바르게 만나는 작법이기도 합니다. 맞힌 길은 담담히 확인하고, 틀린 길은 부끄러움 없이 인정하는 일이니까요.
2025년 9월 22일, 저는 이 블로그에 「젠슨 황이 세계를 도는 이유 : 소버린 AI, 그 찬란한 수사의 이면」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2026년 4월 20일.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일곱 달이 지났고, 한국 정부가 'AI 3대 강국' 로드맵을 처음 공식화한 2024년 연말로부터는 약 1년 반이 흘렀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다시 펼쳐놓고, 당시의 질문들이 지금 어떤 답변을 받고 있는지 솔직히 정리해보려 합니다. 맞힌 대목을 자랑하려는 글이 아니라, 틀린 대목을 감추지 않으려는 글입니다.
▸ 맞힌 대목 : "국가대표 선발"의 구조적 난점
당시 저는 세 가지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정부가 승자를 미리 고르는 방식의 역사적 성공률"에 대한 회의였지요. 일본의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AI 분야에서 '국가대표'를 미리 지정하는 접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적었습니다.
지난 1년의 경과를 보면 이 질문의 그늘은 꽤 선명해졌습니다. 2025년 상반기에 발표된 국가대표 후보 기업들 중 일부는 예산 집행 단계에서 기술 로드맵을 대폭 수정해야 했습니다. 1년 전에 "최첨단"이라 불리던 모델 스케일이, 지금은 오픈소스 모델들로도 따라잡히는 크기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2025년 말부터 2026년 초까지 중국과 미국에서 쏟아진 모델들, 그리고 앤트로픽(Anthropic)의 클로드 4.6과 1백만 토큰 컨텍스트 같은 변화 앞에서 "2024년 시점에서 설계된 로드맵으로 2026년의 경쟁에 나서는 구조적 어려움"이 드러났습니다.
다만 공정하게 말씀드리면, 정부도 이 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2026년 초의 보완 대책 발표에서 "국가대표는 고정된 팀이 아니라, 매년 평가로 교체될 수 있는 로스터 개념"이라는 문구가 등장했습니다. 1년 전 제가 우려하던 경직성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이 방향은 제 예측보다 유연한 대응이었고, 솔직히 반가웠습니다.
▸ 빗나간 대목 : 생각보다 빨리 움직인 '깊이' 전략
반대로, 제가 틀렸던 대목도 있습니다. 작년 글에서 저는 "한국형 버티컬 AI"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권하면서도, 이 전환이 자리 잡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암묵적으로 전제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곱 달 사이 이 방향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대형 병원 세 곳이 2026년 1분기에 한국어 의료 영상 판독 AI의 실제 임상 적용을 시작했습니다. 스탠퍼드 AI 인덱스 2026년판에서도 한국의 의료 AI가 상위권에 오른 지표가 여럿 있었지요. 법률 영역에서는 대법원 판례 데이터를 학습한 특화 모델이 민간 로펌 다섯 곳 이상에 배치되었다는 업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제조 영역에서는 반도체 공정과 배터리 생산 라인의 이상 탐지 AI가 이미 상업 서비스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1년 전 이 방향을 "권장할 만하지만 조심스러운 대안"으로 적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면, 더 강한 목소리로 이 방향을 당위로 주장했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반성이 듭니다. 사려 깊게 말하려다 흐릿하게 말한 대목에 대한 아쉬움이지요.
!벽에 걸린 낡은 지도 위에 색이 바랜 핀과 새로 꽂힌 핀들이 함께 남아 있는 모습
▸ 애매한 대목 : GPU 5만 장의 실체
작년 글에서 가장 조심스러웠던 주제는 GPU 5만 장 공급 계획이었습니다. "의미 있는 단위인지, 아니면 국제 무대 입장권 수준인지 솔직히 물어보아야 한다"고 적었지요. 1년이 지난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애매합니다.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면, AI 컴퓨팅 센터 착공은 2026년에 예정대로 시작되었고, 초기 물량의 일부가 국내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소에 배정되는 시범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몇몇 국내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팀이 이 자원을 활용해 새 모델을 훈련하고 있고, 초기 성과도 조금씩 나오는 중이지요.
어려운 소식도 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빅테크 한 곳이 단독으로 발주한 AI 반도체 물량이 수십만 장 단위라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절대 규모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고, 어쩌면 더 벌어졌습니다. 제가 1년 전 했던 "5만 장이 국제 무대의 최소 입장권 수준"이라는 평가는 지금 보면 너무 낙관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은 그 입장권의 기준선 자체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1년 전의 제 판단을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 : 인재와 전력의 방정식
돌이켜 보면 작년 글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주제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인재 유출이었고, 둘째는 전력 수급이었습니다.
인재 문제는 앞서 언급한 스탠퍼드 AI 인덱스 2026년판에서 공식 데이터로 확인되었습니다. 한국의 AI 박사급 인력 순이동 비율이 OECD 평균보다 나쁜 편에 속한다는 지표였지요. 저는 작년 글에서 이 주제를 한 문장으로 흘려 썼습니다. 지금 보면 한 절을 할애해 다뤘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돈의 경쟁보다 먼저 문제의 경쟁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충분히 강하게 쓰지 못했습니다.
전력 수급 문제는 조금 다른 이유로 다루기 어려웠습니다. 작년 가을 시점에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폭증이 한국보다 미국·아일랜드의 사례로 더 많이 보도되었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2026년 1분기에 발표된 국내 몇몇 대형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의 입지 심의 지연 사례를 보면, 이 문제가 이미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도착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1년 전 "기회비용의 냉정한 질문"이라고만 짧게 썼던 대목을, 지금은 더 구체적인 숫자와 사례로 풀어 써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낍니다.
!오래된 책상 위에 펼쳐진 작년의 원고와 빈 새 종이 한 장이 나란히 놓인 정물
▸ 다시 적어보는 오늘의 문장들
1년 뒤의 자신을 위해, 오늘 저는 몇 문장을 다시 적어두려 합니다.
하나. 정부가 승자를 고르는 모델은 유연한 '로스터 개념'으로 진화하지 않으면 6개월짜리 로드맵이 됩니다. 1년 전의 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지금은 해법의 힌트도 함께 쓰여야 합니다. 평가 주기의 단축, 조기 교체의 제도화, 실패 프로젝트의 학습 자산화 —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할 때만 '국가 차원의 선수단'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가집니다.
둘. '크기의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이 '품질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쓸모 있는 특정 모델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의료·법률·제조·한국어 교육 — 이 네 영역에서만 세계 1위가 되어도, 그 나라의 AI 지위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셋. 표준 제정 테이블에 앉는 일이 GPU 5만 장을 확보하는 일만큼 중요합니다. 지난 주 이 블로그에서 저는 뉴욕 MCP 서밋과 A2A v1.0의 의미를 짚었습니다. 한국의 실무자들이 그런 표준 회의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참여하는지가 앞으로 10년의 운신 폭을 결정할 것입니다.
넷. 인재는 돈보다 문제를 따라갑니다. 한국의 문제를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로 만드는 일 —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인재 정책이라는 사실을, 1년 전의 저는 충분히 강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적어둡니다.
▸ 1년 뒤의 내가 이 글을 다시 펼칠 때
책상의 낡은 지도를 다시 접어 서랍에 넣는 손길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바랜 핀은 버리지 않고, 새 핀은 조심스럽게 꽂아두는 것. 그래야 다음 해에 그 지도를 다시 펼칠 때 지난 길과 새 길이 함께 보이기 때문입니다.
1년 뒤의 제가 이 글을 다시 펼칠 때, 저는 어떤 문장을 또 수정해야 할까요. 어떤 예측이 맞았고 어떤 예측이 빗나갔을까요. 그 답은 지금의 저도 당연히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회고는 자기 자신에게 쓰는 가장 정직한 편지라는 것. 이 편지를 계속 써 내려갈 수 있는 한, 제 생각은 틀리더라도 고쳐질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께도 같은 권유를 드리고 싶습니다. 1년 전 여러분이 AI에 대해 썼던 메모나 회의록이 있다면, 오늘 한 번만 다시 펼쳐보십시오. 맞힌 대목에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시고, 빗나간 대목에서는 부끄러움 없이 줄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그 줄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이 결국 다음 1년을 제대로 설계합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지 않지만, 자기 생각을 갱신하는 인간이 그렇지 못한 인간을 대체한다 — 이 변주가 오늘 제가 스스로에게 적어두는 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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