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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Make More" : 젠슨 황이 SK하이닉스 웨이퍼에 남긴 다섯 글자

"Please Make More" : 젠슨 황이 SK하이닉스 웨이퍼에 남긴 다섯 글자

2026년 6월 2일, 대만 타이베이의 컴퓨텍스 전시장. 한 장의 반도체 웨이퍼 위에 영어 다섯 글자가 친필로 적혔습니다. "Please Make More." 더 만들어 주십시오. SK하이닉스 부스에 전시된 HBM4E 웨이퍼에, 한 사람이 사인 대신 남긴 문장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젠슨 황. 세계에서 가장 비싼 AI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 엔비디아의 수장입니다. 공급받는 쪽의 최고경영자가, 공급하는 쪽의 제품 위에 "제발 더 만들어 달라"고 손으로 적은 이 장면. 그리고 그가 사흘 뒤 직접 한국 땅을 밟았다는 사실. 저는 이 다섯 글자와 그 발걸음이 2026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좌표를 가장 정확하게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 베라 루빈, 그리고 3사의 동시 입장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짚어보겠습니다. 2026년 6월 1일,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 루빈'이 본격 생산에 들어간다고 발표했습니다. 베라 루빈은 천문학자의 이름을 딴 차세대 시스템으로, 이전 세대를 잇는 엔비디아의 새 주력입니다.

주목할 대목은 그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 HBM4(High Bandwidth Memory 4)의 공급사 명단이었습니다. 엔비디아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 세 곳을 모두 HBM4 공급사로 지명했습니다. 첫 시스템은 3분기 중 출하될 예정입니다.

이것이 왜 산업 뉴스인가 하면, 지난 세대 HBM 시장은 SK하이닉스의 사실상 독주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삼성은 한동안 엔비디아의 까다로운 품질 검증, 이른바 '퀄(quality) 테스트' 문턱을 넘지 못해 애를 먹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3사가 나란히 자격을 통과했다는 것은, 삼성이 메모리 경쟁의 한복판으로 복귀했음을 뜻합니다.

젠슨 황은 6월 5일 방한해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이 점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세 곳 모두 퀄을 통과했고, 모두 양산 중이며, 우리에게 공급하려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말이지요. 공급사들이 서로 더 납품하겠다고 다투는 풍경 — 이것이 "Please Make More"라는 다섯 글자가 나온 배경입니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이 검은 가죽 재킷 차림으로 발언하는 모습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이 검은 가죽 재킷 차림으로 발언하는 모습

▸ 보드룸보다 PC방을 먼저 찾은 관계 외교

그런데 이번 방한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사실 반도체 계약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젠슨 황이 한국에서 보인 행보의 '순서'였습니다.

그는 6월 5일부터 7일까지 삼성, LG의 구광모 회장, SK의 최태원 회장, 현대차, 그리고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에 이르는 한국 재계 회장단을 두루 만났습니다. 여기까지는 거물 CEO의 으레 있는 일정입니다. 그런데 그는 두산 베어스의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 시구에 나섰고, 게이머 페이커에게는 사인한 RTX 5090 그래픽 카드를 선물했습니다.

엄숙한 보드룸의 계약서보다 야구장과 PC방, 삼겹살집을 먼저 찾는 이 행보를 저는 '관계 외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단순히 메모리를 사러 온 구매자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생태계 전체와 관계를 맺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던진 키워드도 메모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를 아우르는 '피지컬 AI'라는 단어였지요. 화면 속에 갇혀 있던 AI가 이제 공장과 도로와 물리적 세계로 몸을 갖고 걸어 나온다는 개념입니다.

반도체 웨이퍼 표면에 검은 펜으로 남겨진 NVIDIA 친필 사인
반도체 웨이퍼 표면에 검은 펜으로 남겨진 NVIDIA 친필 사인

▸ 두뇌는 미국, 기억은 한국, 그리고 근육은

이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 보면 흥미로운 분업 구조가 드러납니다. AI라는 거대한 생명체를 신체에 빗대본다면, 그 두뇌에 해당하는 GPU는 미국의 엔비디아가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뇌가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데 쓰는 메모리, 즉 HBM은 한국이 쥐고 있지요. 그리고 젠슨 황이 강조한 로봇과 배터리, 즉 AI가 물리적 세계에서 움직이는 데 필요한 '근육' 역시 상당 부분 한국의 제조 역량과 맞닿아 있습니다.

두뇌는 미국, 기억은 한국, 근육도 한국.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꽤 든든해 보입니다. 한국이 '엔비디아의 메모리 납품처'라는 조연에서, '피지컬 AI 생태계의 파트너'라는 주연급 조연으로 격상되는 전환점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한 발 물러서 보면, 이 그림에는 냉정하게 짚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분석가들은 베라 루빈용 HBM4 물량 가운데 SK하이닉스가 약 60~70%, 삼성이 25~30%, 나머지를 마이크론이 가져갈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만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추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둡니다. 공식 발표된 배분이 아니라 시장의 관측치이니까요.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두뇌를 쥔 자와 기억을 쥔 자의 관계에서, 진짜 협상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Please Make More"라는 다섯 글자는 공급자의 우위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 두뇌가 없으면 기억은 쓰일 곳이 없다는 사실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소버린 AI, 즉 기술 주권을 둘러싼 논의가 뜨거운 지금, 한국이 기억과 근육을 쥐었다는 사실이 곧 주권을 뜻하는지는 더 따져볼 일입니다. 가장 비싼 두뇌를 남이 쥐고 있는 한, 그 분업의 균형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Please Make More"라는 그 친필을 보며, 1970~80년대 한국 반도체 신화의 첫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한국의 반도체는 남이 설계한 칩을 더 싸고 더 빠르게 만들어내는 일에서 시작했습니다. 라이선스를 빌리고, 기술을 배우고, 밤을 새워 수율을 끌어올리던 시절이지요. 그로부터 반세기, 이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술 기업의 수장이 한국 기업이 만든 웨이퍼 앞에서 "제발 더 만들어 달라"고 손으로 적습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자축에 머물 수만은 없는 것이, 그 다섯 글자는 칭찬인 동시에 의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의 역사는 늘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핵심을 쥔 기술은 자산이 되고, 남의 핵심에 매인 기술은 비용이 된다는 것을요. 한국이 쥔 기억과 근육이 자산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두뇌에 매인 비용으로 머물 것인지 — 그 답은 "Please Make More"라는 부탁을 받은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더 만드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무엇을 더 설계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할 때, 그 다섯 글자는 비로소 신화의 다음 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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