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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야드는 제목에 적었고 서울은 탈락시켰습니다 : 남의 가중치를 쓴다는 것

리야드는 제목에 적었고 서울은 탈락시켰습니다 : 남의 가중치를 쓴다는 것

건물을 하나 올린다고 해봅시다. 골조는 이미 서 있습니다. 다른 회사가 세워 놓은 철골을 값을 치르고 넘겨받아, 그 위에 내 설계로 층을 나누고 배관을 깔고 마감재를 붙입니다. 완성된 건물에는 내 이름이 붙고,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내 직원입니다.

이 건물이 준공 검사를 받으러 갑니다. 한 나라의 관청은 서류를 훑고 도장을 찍어 줍니다. 여기에 무엇이 서 있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가만 묻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의 관청은 같은 서류를 보고 반려합니다. 그 철골을 누가 세웠느냐고 묻기 때문이고요.

두 관청 중 어느 쪽이 틀렸을까요? 답을 정하기에 앞서 이틀 전 리야드에서 벌어진 일을 먼저 보겠습니다.

현지 시각 9월 3일, 리야드에서 열린 LEAP 컨퍼런스에서 사우디 국부펀드 PIF 산하의 AI 기업인 휴메인(HUMAIN)이 아랍어 프런티어 모델 humain-m3를 공개했습니다. 4,280억 파라미터 규모의 MoE(Mixture of Experts) 모델이고, 아랍어 네이티브 콘텐츠 1조 토큰 이상으로 추가 사전학습을 거쳤습니다. 공개된 아랍어 벤치마크 7종에서 함께 테스트한 프런티어 모델 가운데 평균 점수가 가장 높았다는 것이 휴메인의 설명인데요. 다만 지금은 자체 플랫폼인 HUMAIN Node에서 리서치 프리뷰로만 열려 있고, 전체 가중치는 안전성 학습을 마친 뒤 다음 달 공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직 받아서 돌려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휴메인의 CEO인 타레크 아민은 아랍어가 수억 명이 쓰는 언어인데도 인공지능의 프런티어에서는 여전히 현저하게 과소대표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우디가 왜 이 모델을 굳이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한 문장입니다.

▸ 베이스가 중국 모델이라는 사실을 제목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델의 베이스는 중국 모델입니다. 상하이의 AI 기업 미니맥스(MiniMax)가 지난 6월 공개한 오픈웨이트 모델 MiniMax-M3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휴메인이 발주하고 미니맥스가 개발해 넘긴 관계인데요. 그리고 휴메인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보도자료 제목이 "HUMAIN Unveils humain-m3, a Frontier Arabic Language Model Developed by MiniMax…"입니다. 자국을 대표할 모델을 발표하면서 제목에 외국 개발사 이름을 그대로 적어 넣은 것이죠.

미니맥스가 정한 커뮤니티 라이선스(MiniMax Community License)에는 이 모델을 상업적으로 쓸 때 웹사이트나 화면, 문서에 "Built with MiniMax M3"를 눈에 띄게 표시하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 모델로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의 연매출이 2,000만 달러를 넘으면 미니맥스의 사전 서면 승인도 받아야 하고요. 표시 의무가 있다는 사실과 제목에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나란히 놓아 두겠습니다. 어느 쪽이 이유였는지는 밖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쨌든 시장은 반응했는데요. 올해 1월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미니맥스의 주가는 발표 직후 5~10% 뛰었습니다.

▸ 국경을 넘은 것은 컨테이너가 아니라 다운로드였습니다

이 발표에서 정작 눈길이 가는 대목은 그 모델이 어디에서 돌아가느냐입니다. 2025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의 걸프 순방을 계기로 사우디는 6,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고, Nvidia는 휴메인에 GB300 1만 8,000개를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슈퍼컴퓨터 한 대분에 해당하는 물량이고, 앞으로 5년간 수십만 개를 더 보낸다는 계획이었죠. AMD도 100억 달러 규모로 5년간 500MW 용량을 함께 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11월 사우디 왕세자의 워싱턴 방문 뒤에 미국은 걸프권에 대한 AI 칩 수출을 승인했고요.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엔비디아 본사. 사우디에 공급되는 GB300 가속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엔비디아 본사. 사우디에 공급되는 GB300 가속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당시 워싱턴에서 이 거래를 설명하는 방식은 분명했습니다. 중동의 AI 인프라를 미국이 가져갔고 그것은 대중국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프라 위에 올라간 첫 번째 간판 모델이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가중치를 베이스로 씁니다.

수출통제는 물건에 대해 설계된 제도입니다. 품번이 있고, 수량을 세고, 선적 서류가 있고, 항구에 세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중치는 실려 오지 않습니다. 받으면 그만이죠. 미국이 실리콘 주위에 세운 울타리는 지금도 잘 서 있는데, 그 울타리 안쪽에서 무엇을 돌릴지는 울타리가 정해 주지 않습니다.

▸ 서울에서는 같은 일이 탈락 사유였습니다

같은 행위에 정반대의 값을 매긴 곳이 서울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진행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줄여서 독파모라고 부르는 사업인데요. 올해 1월 네이버클라우드가 여기서 떨어졌습니다. 하이퍼클로바X 시드 32B 싱크의 비전 인코더가 알리바바 Qwen 2.5의 비전 인코더와 코사인 유사도 99.51%, 피어슨 상관계수 98.98% 이상으로 일치한다는 분석이 나온 뒤였습니다.

정부세종청사.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곳에 있습니다.
정부세종청사.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곳에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네이버클라우드는 외부 인코더를 채택한 것이 글로벌 기술 생태계와의 호환성과 전체 시스템의 효율적 최적화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고, 파운데이션 모델 자체는 프롬 스크래치 단계부터 100%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1월 15일 1차 단계평가에서 네이버클라우드는 벤치마크와 전문가, 사용자 점수를 합산하면 참여한 5개 팀 가운데 상위 4개 팀에 들었지만 '독자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판정을 받고 탈락했습니다. LG AI연구원과 SK텔레콤, 업스테이지가 2차로 올라갔고요. 8월 18일 2차 단계평가에서는 추가 공모로 합류한 모티프테크놀로지스가 떨어지고 세 팀이 남았습니다. 2차 평가 배점은 벤치마크 40점, 전문가 35점, 사용자 25점이었습니다.

이 사업이 내건 기준은 문장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해외 AI 모델을 단순히 파인튜닝한 파생형 모델은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야드에서 발표된 모델을 이 문장 앞에 세워 두면 어떻게 될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습니다.

리야드에서는 남의 베이스를 쓴 사실이 보도자료 제목이 되고, 서울에서는 부품 하나의 출처가 탈락 사유가 됩니다.

▸ 그렇다고 서울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서울의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한 걸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두 사업의 목적이 애초에 다릅니다. 휴메인이 원한 것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아랍어 모델입니다. 제품이죠. 독파모가 원하는 것은 모델을 만들 줄 아는 팀과 그 과정에서 쌓이는 역량입니다. 베이스를 사 오면 베이스 만드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합니다. (오픈웨이트 모델을 받아 직접 파인튜닝해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요, 남이 만든 베이스 위에 얹는 일과 베이스를 처음부터 만드는 일은 필요한 장비도, 데이터도, 사람도 완전히 다릅니다.) 국비가 들어가는 사업이 후자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거꾸로 사우디의 선택도 비웃을 일이 아닙니다. 아랍어를 쓰는 인구가 그만큼인데 그 언어를 제대로 다루는 프런티어 모델이 없다면, 그것을 십 년 걸려 직접 만들 것인지 지금 확보할 것인지는 판단의 문제입니다. 사우디는 후자를 택했고, 대신 자국 대표 모델의 계보에 외국 회사 이름을 남겼습니다. 어느 쪽도 공짜는 아닙니다.

리야드의 데이터센터 안에는 미국 칩과 중국 가중치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미국이 관리한 것은 그중 앞의 절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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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이미지: 리야드 킹 압둘라 금융지구(KAFD) — Wikimedia Commons, Ah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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