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7 대 3입니다.
앞의 숫자는 미국 FDA가 진료 현장에서 쓰라고 허가하거나 승인한 AI 탑재 의료기기의 개수입니다. 뒤의 숫자는 그중에서 환자가 실제로 더 오래 사는지, 덜 입원하는지, 삶의 질이 나아지는지를 확인해 본 기기의 개수고요. 0.2%입니다.
현지 시각 8월 19일 오픈액세스 학술지 PLOS Digital Health에 실린 연구입니다. 토론토대 전기컴퓨터공학과의 라완 아불리브데가 제1저자이고, MIT와 하버드 챈 보건대학원, 존스홉킨스대, 우간다 음바라라 과학기술대, 노르웨이 베르겐대 연구자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연구진은 2025년 12월 5일까지 FDA가 허가·승인한 AI 기기 1,357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수로 훑었는데요. FDA 공개 기기 데이터베이스와 미국영상의학회 데이터사이언스연구소의 AI Central 목록을 대조하고, 각 기기의 510(k) 요약 문서에서 임상시험 등록번호를 뽑아낸 뒤, 그 번호를 PubMed의 논문과 하나씩 연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과는 계단처럼 내려앉습니다. 등록된 전향적 임상시험에 연결된 기기가 34개(2.5%), 그 시험의 결과가 공개된 것이 12개(0.9%), 동료심사를 거친 논문이 나온 것도 12개(0.9%), 그리고 사망률이나 재입원 같은 환자 중심 결과를 본 것이 3개(0.2%)입니다.

*출처: PLOS Digital Health (CC BY 4.0)*
공저자인 MIT Critical Data의 세바스티안 카하스 오르도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거 기반이 얇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얇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규제 당국이 게을렀거나 기업들이 자료를 숨긴 것이라면 이야기가 간단할 텐데, 그쪽이 아니거든요.
▸ 허가는 앞의 것과 같은지를 물었을 뿐입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의료기기가 시장에 들어오는 통로는 510(k)라고 부르는 경로입니다. 이 경로가 신청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인데요.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기존 기기, 그러니까 선행 기기와 실질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보이면 됩니다. 환자에게 이롭다는 증명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실질적 동등성이 뒷받침하는 결론은 새로운 안전 위험을 만들지 않고 앞의 것만큼은 작동한다는 데까지고요.
그러니까 1,357이라는 숫자는 처음부터 1,357개가 검증됐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1,357개가 이전 것과 비슷하다고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허가가 던진 질문 자체가 달랐던 것이죠. 환자가 더 오래 사는가는 물은 적이 없고, 앞의 것과 같은가를 물었습니다. 3이라는 숫자는 그 질문에 답한 기기의 수가 아니라,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본 기기의 수입니다.
이 구조에는 성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새 기기가 앞 세대와 동등하다고 인정받으면, 그 기기가 다시 다음 세대의 기준이 됩니다. 이런 연쇄가 몇 번 반복되면 처음의 선행 기기와는 꽤 달라진 물건이 계속 허가를 받게 되는데요. 이걸 선행 기기 표류(predicate creep)라고 부릅니다. 근거가 비어 있는 자리도 이 연쇄를 따라 세대를 건너 전파됩니다. 앞의 것에 없던 임상 근거가 뒤의 것에서 저절로 생겨날 이유는 없으니까요.
▸ 없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물론 3개라는 숫자를 두고 AI 의료기기가 위험하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면 안 됩니다. 연구진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기가 해롭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근거가 없다고 한 것이고, 없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은 다른 얘기죠. 실제로 허가받은 기기의 약 78%가 영상의학 분야에 몰려 있는데요. 영상 판독을 보조하는 기기처럼 진단 정확도 자체가 목적인 물건을 환자 사망률로 재는 것은 설계상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근거가 없는 채로 1,357개가 이미 진료 현장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리고 근거가 있는 34개를 들여다봐도 마음이 아주 놓이지는 않는데요. 이 시험들 가운데 약 73.5%가 참가자 500명 미만이었고, 68%는 미국 안에서만 진행됐습니다. 34개 중 인종이나 민족 구성을 보고한 시험은 3개뿐이었고요.
누가 시험에서 빠졌는지를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출처: PLOS Digital Health (CC BY 4.0)*
18세 미만 소아를 제외한 시험의 비율이 영상의학과 심혈관 분야에서 100%입니다. 임신부를 뺀 시험도 분야별로 33%에서 42% 사이였고, 정신적 장애가 있는 환자나 영어를 쓰지 않는 환자를 뺀 시험도 분야에 따라 4분의 1에서 3분의 1 남짓이었고요. 아이의 흉부 영상을 판독하는 데 쓰일 기기가, 아이를 한 명도 넣지 않은 시험을 근거로 현장에 나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우리가 AI를 재는 지표도 대부분 같은 종류입니다
여기까지가 의료 이야기인데, 실은 이것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조가 의료기기만의 문제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AI 도입을 평가할 때 손에 쥐는 지표들을 한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벤치마크 점수, 리더보드 순위, 도입한 팀의 수, 처리한 토큰의 양. 이 지표들의 공통점은 전부 앞의 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비슷하거나 나은지를 잰다는 데 있습니다. 510(k)가 묻는 질문과 종류가 같습니다. 편리하고, 빠르게 뽑히고, 숫자로 깔끔하게 떨어지죠. 그런데 그 점수가 실제로 우리 조직에서 무언가를 더 낫게 만들었는지는 전혀 다른 질문이고, 이쪽은 따로 묻지 않으면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예전에 토큰을 많이 쓰는 것을 성과로 착각한 사례를 다룬 적이 있는데요, 같은 구조입니다.
한국도 이 질문에서 비켜서 있지 않습니다. 식약처는 그동안 디지털의료기기 소프트웨어를 1,000건가량 인허가했고, 임상시험 자료 없이 성능 검증 자료만으로 인허가를 받은 실제 사례들을 토대로 임상시험 자료의 제출·면제 기준을 정리했습니다. 올해 6월 30일에는 대규모 언어모델 기반 디지털의료기기의 허가·심사 가이드라인도 제정했고요. 그에 앞서 2025년 1월 생성형 AI 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면서는 세계에서 처음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규제 흐름은 대체로 빗장을 푸는 쪽인데요. 우수관리체계 특례 대상을 넓히고, 실사용 특례를 주는 기간도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늘렸습니다.
빨리 허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좋은 기기가 늦게 들어오는 것도 환자에게는 손해니까요. 다만 빨리 허가하기로 했다면, 허가 이후에 실제 결과를 확인하는 장치가 같은 속도로 따라붙어야 앞뒤가 맞습니다. 논문의 연구진이 내놓은 제안이 그 지점을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준비가 됐다는 판단의 기준은 더 이상 규제 승인 하나여서는 안 되고, 환자에게 실제로 도움이 됐다는 것이 입증되고 또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승인 건수는 성능 지표가 아닙니다. 우리 조직이 AI 도구를 몇 개 도입했는지도 마찬가지고요. 그 숫자들은 틀리지 않았지만, 우리가 정작 알고 싶었던 것을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AI를 어디까지 현장에 들일지는 앞으로도 계속 얘기가 나오겠죠. 다만 무엇을 근거로 들일지, 들인 다음에 무엇을 확인할지는 허가하는 쪽이 아니라 쓰는 쪽이 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고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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