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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은 없어서 못 파는데, 데이터센터는 왜 멈출까

ASML은 없어서 못 파는데, 데이터센터는 왜 멈출까

요 며칠 사이에 방향이 반대로 읽히는 숫자가 두 개 나왔습니다. 하나는 장비 쪽이고 하나는 건물 쪽인데요.

먼저 장비. ASML이 10월 14일 3분기 실적을 냈습니다. 매출 117억 유로, 순이익 50억 유로. 크리스토프 푸케 최고경영자가 한 말이 숫자보다 셉니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2027년과 2028년 공급으로는 고객 수요를 다 채우지 못한다고 했어요. ASML은 이미 2027년에 주력 장비군(High-NA를 뺀 EUV와 DUV 이머전)의 생산능력을 30% 늘리고 2028년에 또 30% 늘리겠다고 밝혀 둔 상태입니다. 그걸 다 하고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래서 2028년 증설 폭을 30%보다 더 키울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부 고객은 2029년과 2030년 장비를 두고 벌써 구매 의사를 전해 왔다고 하고요. 확정 주문은 아니고 의사 타진 단계입니다.

하루 뒤 TSMC도 3분기 실적을 냈습니다. 매출 약 467억 달러로 가이던스 상단을 넘겼고, 올해 매출 성장률 전망을 40%대 초반에서 44% 수준으로 올렸습니다. 올해 설비투자는 600억~640억 달러를 그대로 유지했고, 2026년부터 2028년까지의 투자가 직전 3년보다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했어요. 고성능 컴퓨팅이 매출의 68%쯤 됩니다.

반대쪽 숫자는 파이낸셜타임스가 어제 낸 조사 보도입니다. 올해 미국에서 지연되거나 취소된 대형 데이터센터 프로젝트가 최소 47건이라는 내용이에요. 여기에 애널리스트 추정을 함께 인용했는데, 계획된 파이프라인 중 실제로 지어질 만하다고 볼 수 있는 건 35% 정도라는 겁니다. 번스타인이 10월 11일 낸 집계로는 9월 기준 파이프라인이 456기가와트까지 불었고, 그중 보류된 용량이 51.7기가와트로 역대 최대입니다.

장비는 2028년 것도 모자라는데 건물은 절반 넘게 못 믿겠다니, 둘 중 하나는 틀린 것 같죠. 그런데 둘 다 맞습니다. 서로 다른 시계를 보고 있어서 그래요.

장비 쪽 시계를 보겠습니다. EUV 노광기 한 대를 더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ASML이 자기 공장에서 하는 일입니다. 부품 협력사를 늘리고 조립 라인을 늘리면 연 30%씩 늘릴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할 만큼은 통제 가능한 영역이에요. 고객도 몇 곳 안 되고, 그 몇 곳이 몇 년 치를 미리 걸어 둡니다. 그래서 이 주문서는 "앞으로 짓겠다는 의지"를 아주 이르게, 아주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데이터센터 시계는 다릅니다. 여기서 발목을 잡는 건 건물이 아닙니다. 콘크리트와 철골은 돈을 더 쓰면 빨라져요. 못 당기는 건 전기 쪽입니다. 새 데이터센터는 전력회사에 계통 연계를 신청하고 대기열에 들어갑니다. 전력회사는 이 부하를 붙였을 때 인근 계통이 버티는지 검토하고, 보강이 필요하면 그 설비를 누가 얼마나 부담할지 정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보통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단위로 걸립니다. 보강에 필요한 대형 변압기는 주문하고 받기까지 몇 년이 걸리고, 자체 발전을 하겠다고 해도 가스터빈 역시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이 셋 중 어느 것도 데이터센터를 짓는 쪽이 통제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지역 주민의 반대와 인허가가 얹힙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든 지연 사유에서도 전력 제약이 맨 먼저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숫자는 같은 사이클의 앞과 뒤입니다. 장비 주문서는 선행 지표이고, 완공된 데이터센터는 후행 지표예요. 발표된 기가와트와 실제로 전기가 들어오는 기가와트 사이에는 몇 년과 여러 기관의 결재가 끼어 있습니다. 35%라는 숫자도 "나머지 65%가 취소됐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기준으로 자금·전력·일정이 설명되는 게 그 정도라는 뜻입니다.

이게 실무에서 쓸모가 있는 지점은 발표 자료를 읽는 방법 쪽입니다. 어디가 몇 기가와트를 짓겠다는 소식을 보면 세 가지를 찾아보면 됩니다. 계통 연계 계약이 체결됐는지, 변압기와 발전 설비 발주가 들어갔는지, 전기가 들어오는 시점이 언제로 적혀 있는지. 셋 중 하나도 안 적혀 있으면 그건 계획이지 일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 가지 가정을 하게 됩니다. 예측은 아닙니다. 이 간극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가장 먼저 보일 신호는 프로젝트 취소가 아니라 가동률일 겁니다. 서버는 들어왔는데 전력 계약이 모자라 랙의 일부만 켜 두는 상태 말이죠. 취소는 뉴스가 되지만 반만 켜진 랙은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근거라면 번스타인 집계에서 보류 용량이 한 달 새 2.1기가와트 더 쌓였다는 점, 그리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든 지연 사유에 전력 제약이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돈은 이미 다 걸려 있고 장비도 줄을 섰는데 마지막 한 칸이 전기라는 게 어쩐지 묘합니다. 당분간은 모델 발표보다 전력회사 대기열 소식을 챙겨 보는 게 더 쓸모 있겠다 싶네요.


커버 이미지: 변전소의 750kV 대형 변압기 — Wikimedia Commons, Novoklim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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