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0년대 초,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세계 최초의 상업 발전소를 열었을 때 전기 1킬로와트시의 값은 1달러에 가까웠다고 전해집니다. 그 시절의 1달러는 지금 가치로 수십 달러에 해당하지요. 전구 하나를 밤새 켜두는 비용이 숙련공의 일당에 맞먹던 시절, 전기는 보통 사람에게는 구경거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르자 전기 1킬로와트시의 가격은 몇 센트로 떨어졌고, 100년이 흐른 지금은 가정에서 스위치 한 번 켜고 끄는 데 드는 비용을 누구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전기는 요금이 아니라 공기에 가까워졌지요. 이 곡선을 이해해야 기술의 진짜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가격이 1/10로 떨어지는 순간, 사용처는 10배가 아니라 100배로 늘어난다는 법칙 말입니다.
2025년 11월 24일, 앤트로픽(Anthropic)이 클로드 오퍼스 4.5Claude Opus 4.5를 공개했습니다. 새 모델의 성능을 자랑하는 발표 자료보다 훨씬 눈에 띄었던 한 줄이 있었습니다. "Sonnet 4 대비 67% 가격 인하." 입력 100만 토큰당 5달러, 출력 100만 토큰당 25달러라는 가격표가 함께 공개되었지요. 그리고 같은 날, Agent Skills라는 오픈 표준도 조용히 공개되었습니다.
▸ 67%라는 숫자의 체감
가격 인하의 무게를 먼저 체감해봅시다. 한 기업이 사내 업무 자동화에 AI를 도입해 월 수천만 원의 API 비용을 쓰고 있었다고 합시다. 가격이 67% 떨어진다는 것은, 같은 업무를 하는 데 드는 월 비용이 1/3로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혹은 같은 비용으로 3배 더 많은 업무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 2년간 이런 인하는 한 번이 아닙니다. GPT-4 시리즈도, 제미나이도 비슷한 하락을 반복해 왔지요. 앤트로픽이 이번에 내놓은 숫자는 그 흐름 속의 가장 공격적인 한 수에 속합니다. 2년 전 이 업계에서 "최상위 모델의 추론 1번"은 수십 센트에 가까운 비용을 의미했는데, 지금의 같은 규모 작업은 몇 센트 수준으로 내려왔습니다. 한 자리 숫자가 바뀐 정도가 아니라, 소수점 한 자리가 더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격 곡선의 진짜 의미는 '싸졌다'가 아닙니다. 에디슨의 전기가 1달러에서 몇 센트로 떨어지던 50년의 곡선이 그랬듯, 가격 하락은 "무엇을 만드느냐"의 영역을 통째로 바꿉니다. 싸지 않았을 때는 꿈도 못 꾸던 용처가 싸지는 순간 현실이 됩니다.
▸ 싸지면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오퍼스 4.5 수준의 모델을 한 번 돌리는 데 1달러가 들던 시절에는, AI에게 맡길 일을 극도로 선별해야 했습니다. '고부가가치 업무에 한해서만' 쓰는 전략이 유일한 합리적 선택이었지요.
!전기 스위치 하나에서 황금빛 빛살이 사방으로 뿜어나가는 클로즈업
그런데 가격이 10센트, 5센트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이메일 한 통을 보낼 때마다 AI가 뒤에서 문맥을 점검하고, 회의록이 올라올 때마다 자동으로 요약과 할 일 목록이 정리되고, 고객 문의 하나하나마다 AI가 관련 과거 사례를 붙여 주는 일이 기본값이 됩니다. AI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일의 뒷면에 스며들지요.
그리고 가격이 더 떨어지면, 에이전트가 같은 문제를 여러 번 풀어보고 가장 나은 답을 고르는 접근이 현실화됩니다. 한 번 풀면 끝나는 게 아니라, 열 번 풀어서 검토하고 다섯 번 다시 시도하는 방식이 경제적으로 가능해집니다. 에이전트의 품질은 '모델의 지능'뿐 아니라 '얼마나 여러 번 시도할 수 있느냐'에 의해서도 결정되기 때문에, 이 가격 하락은 에이전트의 질적 도약을 직접 견인합니다.
이것이 앤트로픽이 이번 인하와 함께 Agent Skills를 공개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발표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의 양 날개입니다.
▸ Agent Skills : 기술의 레시피가 떠돈다
Agent Skills는 간단히 설명하면 에이전트가 수행할 작업을 명세하는 공통 포맷입니다.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기술 레시피'를 하나의 스킬로 작성해두면, 그 스킬을 여러 에이전트가 불러 쓸 수 있고, 플랫폼이 달라도 이식 가능합니다.
이 발상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작년에 공개된 MCPModel Context Protocol가 'AI와 외부 도구의 연결'을 표준화한 것이었다면, Agent Skills는 'AI가 수행할 구체적 기능의 명세'를 표준화하려는 시도입니다. 프로토콜이 '통로'를 규정했다면, 스킬은 '그 통로로 오가는 내용물'을 규정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표준이 앤트로픽 독점이 아니라 오픈 표준으로 공개되었다는 점입니다. 경쟁사인 오픈(AI)나 구글의 에이전트도 이 스킬을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요. 겉보기에는 자기 영역을 풀어주는 행보 같지만, 한 발 물러서 보면 꽤 영리한 전략입니다. 표준이 자리 잡으면 가장 성능이 좋은 모델이 가장 많은 스킬을 소비하게 되고, 가장 많은 스킬을 소비하는 모델이 가장 많이 팔립니다. 표준을 여는 자가 가장 많이 쓰이는 모델이 된다는 오래된 기술 경쟁의 법칙이지요.
▸ 가격 경쟁이 데려오는 그림자
그렇다고 이 가격 하락이 모두에게 좋은 뉴스인 것만은 아닙니다. 두 가지 그림자가 따라옵니다.
첫째, 공급자의 수익성 압박입니다. 모델 학습에 드는 자본 지출은 지난 2년간 오히려 가팔라졌는데, 판매 가격은 급락하고 있습니다. 오픈(AI), 앤트로픽, 구글 모두 막대한 투자를 받아 학습 비용을 감당하고 있지만, 이 구조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의 가격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출혈'의 측면이 분명히 있고, 어느 순간 가격이 반등하거나, 상위 모델과 하위 모델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방향으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사용자 쪽의 '무지성 남용'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격이 싸지면 정말 필요한 곳에만 쓰던 신중함이 느슨해지고, "일단 AI한테 물어봐"라는 관성이 업무 전반에 스며듭니다. 이 관성은 단기적으로는 생산성을 높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판단 근육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싼 AI를 잘 쓰는 법이 비싼 AI를 잘 쓰는 법보다 어렵다는 역설이 여기서 생깁니다.
▸ 한국 기업의 새 질문
!오래된 전구 하나가 투명 유리 안에서 따뜻한 빛을 뿜는 정물
한국의 많은 IT 의사결정자들이 지난 1년간 매달렸던 질문이 있습니다. "GPT를 쓸까, 클로드를 쓸까, 제미나이를 쓸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도 전에 가격이 달마다 바뀌고 모델의 성능 순위도 달마다 바뀌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국면이 이어져 왔습니다.
오퍼스 4.5의 인하는 이 질문의 무게를 바꿔 놓습니다. 어떤 모델을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AI에 맡길 것인가가 경쟁의 전장이 된 것입니다. 어차피 모델은 유동적이고 가격은 계속 떨어집니다.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은 '좋은 모델을 선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조직의 업무 중 어떤 부분을 에이전트가 가장 잘 대신할 수 있는지'를 먼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Agent Skills 같은 표준은 기업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줍니다. 자사 업무 프로세스를 스킬 형태로 잘 명세해 두면, 모델이 바뀌어도 그 자산은 재사용됩니다. 반대로 특정 모델 공급자의 고유 API에만 맞춰 시스템을 짜두면, 모델이 교체될 때마다 모든 연결을 다시 만드는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 선택이 몇 년 뒤 AI 네이티브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를 크게 벌릴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 지능이 공기처럼 흔해지는 시대
책의 원고에 "오픈소스 AI가 지능을 공기처럼 흔하게 만들 것"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표현을 쓸 때는 다소 과장된 선언처럼 느껴질까 조심스러웠는데, 2025년 11월 말의 이 가격표가 그 선언을 구체적인 숫자로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67%의 인하,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추가 인하의 곡선은, 몇 년 전의 "고급 지능은 고가의 자원"이라는 전제를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에디슨이 전기 가격을 떨어뜨린 50년의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사건은, 전기 그 자체가 아니라 전기 위에 올라온 새로운 제품들이었습니다. 진공청소기, 냉장고, 라디오, 세탁기. 전기가 싸지지 않았으면 이 모든 것이 가정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2025년 말의 AI 가격이 떨어지는 지금, 그 위에 올라올 '새로운 제품들'은 아직 모두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 제품을 쓸 것인가. 그 질문이 앞으로 몇 년의 경쟁을 결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지금 값비싼 지능을 특별한 자리에만 쓰고 계신가요, 아니면 공기처럼 흔한 지능을 전제로 한 새 제품을 설계하고 계신가요. 가격표는 이미 답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읽어내지 못하는 조직만 그 답을 놓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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