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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넘기고 청구서는 떠안았습니다 : 앤트로픽의 테세우스

건물은 넘기고 청구서는 떠안았습니다 : 앤트로픽의 테세우스

테세우스의 배라는 오래된 역설이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영웅 테세우스가 타고 돌아온 배를 기념물로 보전하면서, 널판이 썩을 때마다 하나씩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고 해요. 플루타르코스가 전한 이야기죠. 마지막 널판까지 교체된 뒤에도 그것이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철학자들이 아직도 붙잡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 역설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답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옮겨 다니며, 여기저기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죠. 배를 이루는 것이 널판인지, 널판을 배치한 설계인지, 아니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르기로 한 사람들의 합의인지... 무엇을 배의 본질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답이 바뀝니다.

지난 10일, 앤트로픽이 참여해 새로 만든 회사의 이름이 바로 테세우스(Theseus)였습니다.

▸ 이름에 앤트로픽이 없습니다

앤트로픽과 맥쿼리 자산운용, 그리고 싱가포르 국부펀드 GIC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테세우스 인프라(Theseus Infrastructure)를 세웠습니다. 데이터센터를 지어 앤트로픽에 장기 임대하는 회사입니다. 부지를 찾고 건설하고 운영하는 일을 모두 이 회사가 맡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지분 구조입니다. 맥쿼리 자산운용이 운용하는 펀드들과 GIC가 플랫폼을 공동 소유하고, 각 프로젝트 지분의 과반도 이들이 출자합니다. 앤트로픽의 역할은 앵커 테넌트(Anchor tenant), 즉 장기 계약으로 시설을 빌려 쓰는 핵심 임차인입니다. 회사 이름에 앤트로픽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앤트로픽은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인 셈이죠.

투자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는데요. 맥쿼리가 낸 보도자료에 달러 수치가 한 줄도 없습니다. 초기 집중 지역은 미국이고, 각 시설은 앤트로픽의 작업 특성에 맞춰 전용으로 지어집니다. 건설 일자리와 상시 운영 인력이 수천 명 규모로 생길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담겼습니다.

복원된 아테네 삼단노선 올림피아스호.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이렇게 널판을 하나씩 갈아 끼우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복원된 아테네 삼단노선 올림피아스호.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이렇게 널판을 하나씩 갈아 끼우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 자산은 넘기고 비용은 떠안았습니다

앤트로픽이 데이터센터에 돈을 쓰지 않는 회사는 아닙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내 데이터센터에 500억 달러(약 70조 원)를 투입한다고 발표했고, 텍사스와 뉴욕의 시설이 올해 순차적으로 가동에 들어가는 일정이었죠. 그러니 이번 테세우스는 돈이 없어서 외부 자본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소유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가깝습니다.

사실 자산을 장부 밖으로 내보내는 것 자체는 요즘 빅테크에서 드문 일은 아닙니다. 임대료를 운영비로 처리하고, 시설 투자 리스크는 남에게 남겨두는 방식이죠. 그러니 이번 발표에서 정작 주목할 대목은 소유를 넘긴 부분이 아니라 비용을 끌어안은 부분입니다.

앤트로픽은 지난 2월, 자사 데이터센터를 전력 계통에 연결하는 데 필요한 설비 보강 비용을 100% 부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변전소와 송전선 같은 설비가 여기에 들어갑니다. 자체 발전으로 충분히 메우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전력회사와 함께 소비자 전기요금 인상분을 추정해 보전하겠다고도 했죠. 앤트로픽의 CEO인 다리오 아모데이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델을 돌리는 비용은 앤트로픽이 져야 하고, 평범한 미국인이 져서는 안 됩니다."

이번 테세우스의 보도자료에도 같은 약속이 다시 실렸습니다. 이 시설들 때문에 소비자가 겪을 수 있는 전기요금 인상분을 앤트로픽이 부담한다는 문장입니다.

통상 기업은 반대로 움직입니다. 자산은 자기 것으로 쥐고, 비용과 부채는 밖으로 넘기죠. 앤트로픽은 건물의 소유권과 그 자산가치 상승분을 맥쿼리와 싱가포르 국부펀드에 넘기고, 전기요금 고지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한 모든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했습니다.

▸ 발목을 잡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허가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자본과 투자의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맥쿼리와 GIC 같은 인프라 자본은 지금 AI 데이터센터 앞에 돈주머니를 들고 줄을 서 있습니다. 반면 정말 큰 문제는 허가입니다. 계통 연계 대기열, 변전소 인허가 그리고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아 든 지역 주민의 반발까지 말이죠. 지분은 유연하게 대처하고, 전략은 바뀔 수 있지만 인허가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미국의 데이터센터 위치를 고압 송전망 위에 겹쳐 놓은 지도입니다. 점이 굵은 곳은 선도 굵습니다.
미국의 데이터센터 위치를 고압 송전망 위에 겹쳐 놓은 지도입니다. 점이 굵은 곳은 선도 굵습니다.

*출처: 미국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NREL)*

그러니 소비자 요금을 대신 내겠다는 약속은 선의라기보다 입장권 값에 가깝습니다. 물론 선의가 아니라고 해서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싸움의 전선이 어디로 옮겨갔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셈이죠.

예전에 엔비디아가 오픈AI의 데이터센터 부채를 보증한다는 보도를 다룬 적이 있는데요. 칩을 파는 회사의 돈이 칩을 사는 회사로 흘러가 다시 칩 구매로 돌아오는 순환금융이었죠. 이번 테세우스는 정반대입니다. 돈이 인프라 자본에서 나오고, 소유권도 그 쪽에 남고, 앤트로픽에 되돌아올 지분도 없습니다.

물론 앤트로픽이 모든 것을 빌리기로 한 것은 아닙니다. 이달 5일에는 자체 AI 칩 설계팀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습니다. 연봉 32만 ~ 49만 달러 규모의 채용 공고였고, The Information은 7월에 제조 파트너로 삼성을 타진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죠. 건물은 빌리고 설계는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널판을 다 갈아 끼워도 배가 남는 이유는 설계가 남기 때문이라는 답을 고른 셈이죠.

▸ 우리는 아직 요금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국내 논의는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어제 나온 국내 보도를 보면, 정부는 산업용 전기요금의 지역별 차등화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 전용 요금체계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데이터센터가 수도권에 몰려 있으니, 전력자립도가 높은 지역으로 분산을 유도하겠다는 구상이죠. 경북이 228%, 전남이 213%, 충남이 207%로 전력 자립도가 높은 수준으로 거론됩니다. 전기신문이 정리한 수치로는 2029년까지 신규 건설이 요청된 데이터센터의 전력 용량이 4만 9,397MW에 달하고, 이를 감당하려면 1GW급 발전기를 53기 더 지어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국내 데이터센터 임대차가 이미 패스스루(pass-through)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임대인이 실제 전기요금을 임차인에게 청구하고, 그 전기 요금이 총점유비용을 좌우하죠. 임차인이 자기 계량기에 찍힌 요금을 내는 것은 똑같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논의는 아직 어디에 지을지, 누가 더 싼 요금을 받을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발전기 53기를 더 지어야 한다면 그 비용이 어디선가 청구될 텐데, 그 고지서를 데이터센터가 받는지 일반 가구가 부담할지는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요금을 낮춰 유치하는 경쟁과 보강 비용을 부담시키는 규칙은 함께 논의되어야 할 부분인데, 지금은 요금을 낮춰 유치 경쟁 얘기만 나옵니다.

데이터센터를 어디에 지을지는 앞으로도 계속 얘기가 나오겠죠. 전기 요금 고지서를 누가 받을지, 부대 비용은 누가 지불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앤트로픽 #데이터센터 #AI인프라 #전력 #GIC #AI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