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때 우리가 가장 빨리 지나가는 화면이 있습니다. 이용약관이죠. 스크롤바를 끝까지 내리고 동의에 체크하기까지 몇 초쯤 걸릴까요? 저는 그 문서를 끝까지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읽히기 위해 쓰인 문서가 아니고요. 어겼을 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봐야 계정이 정지되는 정도입니다. 힘이 없는 문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미국 연방법원이 59페이지짜리 판결문으로 다룬 것이 정확히 그 문서였습니다.
현지 시각 8월 27일 목요일 저녁, 캘리포니아 북부연방지방법원의 리타 F. 린 판사가 미국 국방부의 조치를 위법으로 판단했습니다. 국방부가 AI 기업 앤트로픽에 붙였던 공급망 위험(supply chain risk) 지정을 철회하라는 명령이었는데요. 여섯 달을 끌어온 분쟁의 발단은 무기도 예산도 아니었습니다. 이용약관 두 줄이었습니다.
▸ 국방부는 앤트로픽의 이용정책을 지키기로 계약서에 썼습니다
시작은 지난해 여름입니다. 2025년 7월, 미국 국방부의 최고디지털·AI책임실(CDAO)이 앤트로픽과 구글, xAI 세 곳에 각각 최대 2억 달러를 상한으로 하는 2년짜리 계약을 부여했습니다. 한 달 앞서 OpenAI가 같은 규모의 계약을 받은 데 이어진 것이었고요. 앤트로픽과 맺은 이 계약으로 Claude는 기밀망에서 사용이 승인된 최초의 프런티어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흔치 않은 조항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국방부가 앤트로픽의 이용정책(AUP)을 준수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읽어볼 만한 문장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민간기업이 만든 약관을 지키겠다고 서명했다는 뜻이니까요. (실은 이 대목이 이상해서 판결 기사들을 계속 찾아보게 됐습니다.)
그 약관이 금지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국내 감시, 그리고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표적을 고르고 교전하는 완전 자율 무기. 앤트로픽이 든 이유는 윤리라기보다 성능 쪽에 가까웠습니다. 오늘의 기술이 안전하고 신뢰성 있게 해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판단이었죠.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국방부가 조건을 다시 열자고 했습니다. Claude를 "모든 합법적 목적(all lawful purposes)"에 제한 없이 쓰겠다는 것이었는데요. 앤트로픽은 나머지 조항은 조정할 뜻을 밝혔지만 위의 두 가지는 끝까지 내주지 않았습니다.
몇 주에 걸친 협상이 끝내 결렬됐고, 국방부는 2026년 2월 27일 금요일 오후 5시 1분을 최종 시한으로 통보했습니다. 앤트로픽이 응하지 않자 그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 연방기관에 앤트로픽 기술 사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같은 날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앤트로픽을 공급망 위험으로 지정하면서, 효력 즉시 미군과 거래하는 어떤 계약자나 공급자, 파트너도 앤트로픽과 어떠한 상업적 활동도 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기관에는 여섯 달의 전환 기간이 주어졌고요.

*출처: 미 국방부*
▸ 장관이 꺼낸 권한은 그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법률가들이 먼저 갸웃했던 대목이 있습니다. 헤그세스 장관의 근거로 지목된 조항은 미국 연방법전 10편 3252조(10 U.S.C. § 3252)인데요. 이 조항이 장관에게 주는 권한은 국가안보시스템 조달에서 특정 공급자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미군과 거래하는 모든 회사에게 특정 기업과의 모든 상업적 거래를 끊으라고 명령할 권한이 아니고요. 법이 준 권한보다 실제 조치가 처음부터 훨씬 넓었던 셈입니다.
지난 3월에 이미 예비적 금지명령이 나왔고, 이번 것은 본안에 대한 판결입니다. 린 판사는 네 가지 쟁점 모두에서 앤트로픽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하나는 수정헌법 1조 위반, 그러니까 보복이라는 판단이었고요. 둘은 박탈에 앞서 거쳤어야 할 절차를 주지 않았다는 수정헌법 5조 위반, 셋은 공급망 관련 법률이 준 권한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 넷은 행정절차법상 자의적이고 전단적인 처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제 수단은 영구적 금지명령이었습니다.
▸ 법원이 지킨 것은 안전 원칙이 아니라 말할 권리입니다
헤드라인만 보면 "AI 기업이 국방부를 이겼다"로 읽힙니다. 그런데 판결문이 실제로 판단한 것은 앤트로픽이 그은 두 줄이 옳으냐가 아닙니다.
린 판사는 국방부의 조치가 "앤트로픽이 정부를 비판한 '오만함'에 대해 공개적인 본보기를 만들려는 욕구에 근거한 것이지, 앤트로픽이 실제로 자사 모델을 사보타주하리라고 볼 어떤 설명 가능한 근거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고요. "국가안보를 공허하게 들먹이는 것이 정부 비판자를 처벌하고 보복할 백지수표가 되지는 않습니다."
즉 법원이 보호한 것은 대규모 감시와 자율무기에 대한 앤트로픽의 판단이 아니라, 그 판단을 공개적으로 말할 권리였습니다. 정부는 여전히 앤트로픽을 사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말했다는 이유로 벌줄 수는 없다는 것이죠. 승리의 크기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종류를 정확히 해두려는 것입니다. 군사용 AI에 어디까지 자율성을 줄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는 이번 판결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물론 국방부 쪽 물음도 그냥 흘려보낼 것은 아닙니다. 선출된 적 없는 민간기업이 약관 한 줄로 군사 작전의 범위를 정하는 구조가 과연 옳은가? 유사시에 벤더가 스위치를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앤트로픽이 든 근거 자체가 "오늘의 기술"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도 짚어둘 만합니다. 기술이 나아지면 그 선은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고, 실제로 회사는 나머지 조항들에 대해서는 조정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고정된 원칙이라기보다 지금 시점의 판단에 가깝습니다. 같은 시기 OpenAI는 반대 방향으로 갔죠. 국방부 기밀망에 자사 AI를 배포하는 계약을 발표했고, 그 직후 이용자들 사이에서 #QuitGPT 운동이 번졌습니다. 같은 문 앞에서 두 회사가 서로 다른 선택을 했고 각자 다른 값을 치렀는데,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아직 아무도 정산하지 못했습니다.
▸ 우리가 모델을 도입할 때 실제로 서명하는 것
소버린 AI 이야기는 대개 GPU 몇 장, 데이터센터 몇 동, 국산 NPU 몇 종으로 흘러갑니다. 만질 수 있는 것들이라 세기도 쉽고 예산도 붙기 쉽죠. 그런데 이번 사건이 드러낸 통제선은 그 층이 아니었습니다. 기밀망에 모델을 올려두고도, 그 모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공급자가 쓴 문서가 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공공기관이 해외 모델을 도입할 때 실제로 서명하는 것도 성능표가 아니라 이용정책입니다. 조달 문서에 그 조항을 읽고 협상하는 칸이 있는지, 있다면 누가 그 칸을 채우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섯 달을 다투고 59페이지를 받아낸 이번 경우는 그래도 미국 안에서 미국 회사가 미국 정부를 상대한 사건이었고요.
우리는 앞으로도 약관을 끝까지 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그 문서가 언제부터 힘을 갖는지, 우리 쪽 계약서에는 그 문장이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는 한 번쯤 고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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