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엔비디아와 AMD는 같은 회사의 같은 투자 라운드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월드랩스(World Labs)라는 2년 차 연구소였고, 라운드 규모는 10억 달러였어요. 일곱 달 남짓 지난 9월 28일, 그중 한 곳이 그 회사를 통째로 샀습니다. AMD가 82억 달러를, 그것도 전액 자사 주식으로 냈습니다.
월드랩스는 2024년 1월에 세워졌습니다. 창업자는 넷인데요. ImageNet을 만든 스탠퍼드의 페이페이 리(Fei-Fei Li)가 CEO고, 나머지 세 사람의 이력이 이 회사의 성격을 더 정확히 말해 줍니다. 저스틴 존슨(Justin Johnson), NeRF(Neural Radiance Fields)를 함께 고안한 벤 밀든홀(Ben Mildenhall), 그리고 가우시안 스플래팅(Gaussian Splatting)의 바탕이 된 렌더러 펄사(Pulsar)를 만든 크리스토프 라스너(Christoph Lassner)입니다. 언어 모델을 만들던 사람들이 아니라 3차원 장면을 복원하고 렌더링하던 사람들이에요. 회사가 내놓은 제품은 마블(Marble)인데, 텍스트나 이미지, 영상, 파노라마를 넣으면 공간적으로 앞뒤가 맞고 계속 유지되는 3D 월드를 만들어 줍니다. 최신 모델인 아틀라스(Atlas)는 2D 이미지에서 찍지 않은 카메라 시점을 예측하고요.
거래 조건부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82억 달러 전액 주식이고, 규제 승인을 거쳐 연말에 종결될 예정입니다. 아직 끝난 거래가 아니에요. 종결되면 페이페이 리는 AMD 총괄부사장 겸 수석과학자로 합류해 리사 수(Lisa Su) 회장 겸 CEO에게 직접 보고합니다.
▸ 발표문이 말한 것은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표문에서 정작 눈에 걸리는 문장은 제품 이야기가 아닙니다. 월드랩스의 역량이 "워크로드가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AMD에 제공하고 향후 기술 로드맵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리사 수도 같은 말을 했어요. "다음 세대 AI를 위한 컴퓨트 플랫폼을 만들려면 모델이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Fuzheado
칩을 파는 회사가 모델을 만드는 회사를 사면서 내놓은 이유가 매출도 제품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먼저 보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칩 설계 일정을 겪어 보신 분들은 이 말이 왜 나오는지 아실 텐데요. 아키텍처를 확정하고 실리콘이 나와 데이터센터에 꽂히기까지는 몇 년이 걸립니다. 지금 정하는 메모리 대역폭과 온칩 메모리 크기, 인터커넥트 구성은 오늘의 워크로드가 아니라 몇 년 뒤의 워크로드를 겨냥한 것이어야 하고요. 그래서 칩 회사로서는 가장 비싼 정보가 성능 수치가 아니라, 다음에 무엇이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답입니다. 그 답을 바깥에서 벤치마크로 추정하는 것과, 그 모델을 만드는 팀을 사내에 두고 매주 들여다보는 것은 다른 이야기예요.
▸ 2,030만 개를 매 프레임 정렬합니다
그리고 월드랩스가 돌리는 워크로드는 모양이 다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Jurdein
위 화면의 계기판을 보면 한 장면에 2,030만 개의 가우시안이 올라가 있고, 프레임마다 정렬에 3.5밀리초, 렌더에 6.75밀리초가 들어갑니다. 텍스트 토큰을 하나씩 뽑아내는 것과는 계산의 성격 자체가 다르지요. 장면 전체가 메모리에 상주해야 하고, 매 프레임 수천만 개를 정렬해야 하고, 그 상태가 다음 프레임까지 유지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로봇 학습과 시뮬레이션까지 얹히면 읽고 쓰는 패턴은 더 벌어지고요. AMD가 보도자료에서 이번 인수의 배경으로 짚은 영역도 추론(reasoning)과 로보틱스, 시뮬레이션, 그리고 피지컬 AI였습니다.
물론 이번 발표만 놓고 AMD의 로드맵이 이미 바뀌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MD도 월드랩스도 로드맵의 무엇이 구체적으로 달라지는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전액 주식 거래라면서 몇 주를 발행하는지, 희석이 얼마나 되는지도 공개하지 않았고, 월드랩스의 매출이나 직원 수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마블과 아틀라스를 제품으로 계속 팔 것인지에 대해서도 양쪽 모두 침묵했고요. 2월 라운드의 기업가치가 약 50억 달러였다는 숫자 역시 보도에 근거한 것이지 회사가 확인해 준 적은 없습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AMD가 로드맵의 입력을 바꾸겠다고 말했고 그 값으로 82억 달러를 적어 냈다는 것까지입니다.
▸ AMD가 하드웨어가 아닌 것을 산 첫 사례입니다
그럼에도 이 거래를 AMD의 인수 이력 위에 놓고 보면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2006년의 ATI는 그래픽 IP였고, 2022년 2월에 종결한 자일링스(Xilinx)는 FPGA였습니다. 취득 대가가 488억 달러로 지금까지 AMD 최대 인수고요. 2025년 3월에 마무리한 ZT 시스템스(ZT Systems)는 약 49억 달러짜리 랙 스케일 시스템 회사였습니다. 그래픽 IP에서 FPGA로, 다시 랙 스케일로 스택을 한 칸씩 위로 올라간 셈이지요. 8월 6일에 계약한 탈라스(Taalas)도 모델 가중치를 실리콘에 통째로 각인하는 추론 칩 회사였는데, 예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고요. 여기까지는 전부 하드웨어입니다. 82억 달러의 월드랩스는 자일링스에 이어 AMD 역대 2위 인수인데, 하드웨어가 아닌 첫 사례예요.
두 회사가 어제오늘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2025년부터 AMD GPU 위에서 학습과 추론 최적화를 함께 해 왔고, 페이페이 리는 올해 초 AMD의 CES 발표에도 등장했습니다. 리사 수는 월드랩스의 초기 투자자이기도 했고요.
▸ 반대쪽에서도 같은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페이페이 리의 설명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집중된 하드웨어 노력이 없으면 AI는 효율에서 발목이 잡힙니다. 그리고 규모에서도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어요. "이걸 하려면 우리의 노력을 키우고, 도달 범위를 넓히고, 하드웨어에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칩 회사가 모델을 보러 온 것이기도 하지만, 모델을 만드는 쪽이 칩을 가지러 간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지요. 그가 남긴 문장 하나가 그 이유를 압축합니다. "우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실제 사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 거래가 엔비디아와의 격차를 좁힐 것인가는 아직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종결도 되지 않았고, 로드맵의 어느 줄이 바뀌는지도 공개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엔지니어 입장에서 지금 점검해 볼 만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용량을 산정하고, 메모리를 계획하고, 벤치마크를 고를 때 머릿속에 두고 있는 AI 워크로드의 기본형이 무엇인지요. 그게 여전히 텍스트 토큰을 뽑아내는 트랜스포머 추론 하나라면, 그 전제가 언제까지 유효한지는 한 번 따져 볼 필요가 있겠죠. 칩을 파는 쪽은 이미 82억 달러를 걸고 그 전제를 다시 보기로 한 참입니다.
커버 이미지: 페이페이 리 (2017년 ITU AI for Good 서밋) — Wikimedia Commons, ITU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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