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 단어 agent를 사전에서 찾으면 첫 번째 뜻은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대리인입니다. 본인을 대신해 행위할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한 일이 본인에게 귀속되는 관계. 부동산 중개인도 agent이고 운동선수의 매니저도 agent이지요.
우리는 2년 넘게 이 단어를 마케팅 용어로 소비해 왔습니다. AI 에이전트, 에이전틱 워크플로, 멀티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그런데 이 이름을 고른 사람들이 원래 뜻까지 계산에 넣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대리 법리의 요체는 권한을 위임받은 자의 행위가 본인의 행위가 된다는 것인데, 이 문장은 편익과 책임을 한꺼번에 옮기거든요.
2026년 8월 4일,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이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읽었습니다. 아마존이 퍼플렉시티를 상대로 받아냈던 가처분을 파기하면서요. 이유는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아마존 서버에 접근한 것은 퍼플렉시티가 아니라 사용자다.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퍼플렉시티의 AI 브라우저 Comet에는 Assistant라는 에이전트가 들어 있습니다. 사용자의 아마존 계정에 사용자 본인의 자격증명으로 로그인해 상품을 찾고 결제까지 마칠 수 있지요. 아마존은 2025년 11월 이 기능을 문제 삼아 소송을 냈습니다. 핵심 근거는 1986년에 제정된 연방 컴퓨터사기남용법(CFAA)이었습니다. Comet이 구글 크롬으로 위장해 접근했고, 비밀번호로 보호된 영역에 권한 없이 들어왔다는 주장이었고요. 캘리포니아 북부연방지방법원은 2026년 3월 초 이 주장을 받아들여 계정 페이지와 주문 내역, 결제 영역에 대한 Comet의 접근을 금지했습니다.
▸ 1986년의 법으로 2026년을 재단할 때 : 관용의 원칙
CFAA는 해킹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형사법입니다. 성립 요건은 세 가지입니다. 보호 대상 컴퓨터에 고의로 권한 없이 접근할 것, 정보를 취득할 것, 1년간 5,000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할 것.
항소심 재판부는 아마존이 본안에서 이길 가능성이 낮다고 봤습니다. Comet은 사용자의 지시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도구이고, 그렇다면 접근이라는 행위의 주체는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쥔 사람이라는 논리였지요. 언론 보도가 판결문을 인용해 전한 바로는, 재판부는 그 구조를 이렇게 봤습니다. 화면을 캡처해 보내는 것은 사용자 본인의 브라우저이고, 퍼플렉시티 서버는 그 스크린샷을 받아 다음 동작을 지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버를 향해 자동화된 요청을 직접 쏘아 대던 과거의 봇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국 법원이 기술을 따라잡지 못할 때 꺼내 드는 도구가 하나 동원됐습니다. 관용의 원칙(rule of lenity), 형사처벌이 따르는 법률의 의미가 모호하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해석한다는 오래된 태도이지요. 2021년 연방대법원의 밴 뷰런 판결이 '권한 초과 접근'을 좁게 새긴 것도, 2022년 hiQ 사건에서 공개된 웹페이지에는 무단 접근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도 같은 계보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판결문의 솔직함입니다. 재판부는 에이전틱 AI가 신생 기술이며, Assistant 같은 AI 에이전트에게 책임을 어떻게 귀속시킬지 직접 다룬 선례가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적었습니다. CFAA 맥락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고요. 법이 모른다고 인정한 자리에서 판결이 나왔습니다. 40년 된 법으로 2026년의 소프트웨어를 재단하려던 시도가 일단 제동이 걸린 셈입니다.
▸ 이것은 승소 기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발 물러서야 합니다. 이 소식이 "퍼플렉시티 승소"로 소비되는 것을 여러 곳에서 봤는데, 정확하지 않습니다.
법원이 판단한 것은 가처분의 요건, 즉 아마존이 본안에서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입니다. 퍼플렉시티의 방식이 적법하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고요. 본안 소송은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법에서 계속됩니다. 아마존은 전원합의체 재심리를 신청하거나 연방대법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마존은 이번 결정에 정중히 동의하지 않으며 본안에 자신이 있고 다음 단계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퍼플렉시티 쪽은 인터넷 사용자가 원하는 AI를 선택할 권리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고 했고요.
관할의 문제도 있습니다. 제9연방항소법원은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을 포함한 서부 관할입니다. 실리콘밸리 전역이 여기에 들어가니 무게는 가볍지 않지만, 전국을 구속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항소법원이 다르게 판단하면 결국 연방대법원의 몫이 되겠지요.
그리고 가장 자주 오해되는 지점. 크롬으로 위장한 행위와 비밀번호를 다루는 약관의 적정성은 이번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법원이 답한 질문은 오직 하나, 누가 접근했는가입니다. 위장의 정당성, 자격증명 취급 방식, 계약 위반 여부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법원이 퍼플렉시티의 구현 방식을 승인했다고 읽으면 오독입니다.
▸ 대리 법리의 나머지 절반
이제 반전입니다.
대리 법리는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 문장은 대리인의 행위가 본인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고, 뒤 문장은 그러므로 그 행위의 책임을 본인이 진다는 것입니다. 항소법원은 앞 문장만 적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 문장은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에이전트가 아마존에 접근한 것이 사용자의 접근이라면, 아마존 이용약관을 위반한 것도 사용자입니다. 재판부가 답한 것은 어디까지나 CFAA상 '접근'이 누구의 것이냐였고, 아마존이 자기 약관으로 접근을 통제하는 길까지 닫힌 것은 아닙니다. 전선이 형법에서 계약법으로 옮겨 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계약의 상대방은 개발사가 아니라 계정을 가진 개인이지요. 계정 정지, 주문 취소, 손해배상의 위험을 지는 쪽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의 한 매체가 붙인 헤드라인이 이 지점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당신의 AI 에이전트는 해킹법을 위반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은 위반할 수 있다.
여기에 보안 쪽 그림자가 하나 더 겹칩니다. 로그인된 세션 안에서 동작하는 브라우저 에이전트는 프롬프트 인젝션의 이상적인 표적입니다. 상품 페이지 어딘가에 심어 둔 문장 한 줄이 사용자의 결제 권한을 빌려 쓸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지난달 에이전틱 랜섬웨어를 다루며 이야기했던 공격면이 이제 평범한 쇼핑 화면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스크린샷을 찍고 크롬으로 위장하는 것이 2026년 최첨단 에이전트의 실제 작동 방식이라는 사실도 곱씹을 만합니다. 1994년의 robots.txt는 법이 아니라 신사협정이었고, 그 협정이 무너진 자리에 지금 법정이 서 있습니다. 합의된 연결층이 없으면 에이전트는 남의 문을 두드리는 방법부터 발명해야 하지요. 지난달 MCP 표준 경쟁을 다루며 짚었던 이야기가 여기서 돌아옵니다.
▸ 한국 : 담장은 높아지는데, 질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한국의 자리에서 읽으면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정당한 접근권한 없이, 또는 허용된 권한을 넘어 정보통신망에 침입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CFAA의 사촌 격이지요. 다만 한국 법원이 AI 에이전트를 두고 이 질문을 받아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크롤링을 침입죄로 다툰 사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몇 해 전 대법원은 경쟁 숙박앱의 서버를 1,500만 회 넘게 긁어 간 사건에서 무죄를 확정했는데, 이유가 이랬습니다. 로그인 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정보였고, 막아 둔 장치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아마존 건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로그인 뒤의 영역이고, 막아 둔 장치가 있었지요. 같은 행위를 다른 그릇에 담으면 결론도 달라집니다.
시장 쪽은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업계 보도를 종합하면 네이버와 쿠팡은 외부 AI 크롤러를 차단하면서 자체 쇼핑 에이전트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마존이 법정에서 하려던 일을 국내 플랫폼은 담장 높이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회사 안쪽도 마찬가지여서, 네이버와 카카오, 당근이 권한이 큰 오픈소스 에이전트의 사내 사용을 금지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플랫폼과 에이전트 사이의 전선이 회사 밖과 안에서 동시에 그어지고 있습니다.
엔지니어에게 이번 판결을 번역하면 문장 하나가 남습니다. 에이전트의 법적 지위가 배포 아키텍처에 달렸습니다. 서버에서 대신 요청을 쏘면 그것은 회사의 접근이고, 사용자 기기의 세션 안에서 동작하면 사용자의 접근입니다. 같은 기능, 같은 화면, 다른 피고인입니다. 이건 법무팀에 넘길 이슈가 아니라 설계 단계에서 결정되는 이슈이지요.
우리는 편하려고 대리인을 씁니다. 대리인을 쓰는 대가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였습니다. 그가 한 일이 곧 내가 한 일이 된다는 것. 여러분이 에이전트에게 계정과 카드를 맡길 때, 그 계약서의 서명란에 적히는 이름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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