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강당에 51개국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서로를 폭격기로 겨누던 나라들이었지요.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 중국과 훗날의 동유럽 국가들까지 모두 한 탁자에 앉아 유엔 헌장에 서명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적이었던 자들이 손을 내밀어 공동의 규약을 쓴 순간입니다.
그보다 30년쯤 앞선 1919년에는 파리에서 국제 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1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뒤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합의의 소산이었지요. 연맹은 결국 2차 대전을 막지 못했지만, 그 실패를 교훈 삼아 유엔이 세워졌습니다. 위기가 클수록, 협력의 제도는 더 큰 규모로 다시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2025년 12월, 조금 다른 차원의 원탁이 등장했습니다. 리눅스 파운데이션(Linux Foundation) 산하에 Agentic AI Foundation(AAIF)이 공식 출범했는데요. 창립사로 이름을 올린 여섯 회사의 명단을 보면 눈이 한 번 더 가게 됩니다. 오픈(AIOpenAI), 앤트로픽(Anthropic), 구글(Goog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AWS, 그리고 Block. 불과 몇 달 전까지 서로의 모델 성능을 놓고 수치 한 줄, 벤치마크 한 점을 놓고 공방을 벌이던 회사들입니다.
저는 이 출범의 의미를 기술의 관점만이 아니라 역사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거인들이 전쟁의 폐허에서 유엔을 세운 것처럼, 21세기 AI 거인들은 파편화라는 폐허를 내다보며 연맹을 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 AAIF는 왜 지금 나왔는가
AAIF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난 1년의 풍경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2024년 말 앤트로픽이 MCP(Model Context Protocol)를 공개했고, 2025년 4월 구글이 A2A(Agent-to-Agent) 프로토콜을 내놓았습니다. 두 표준이 나온 이후 업계는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주요 AI 제공사들은 저마다의 에이전트 개발 플랫폼을 내놓았고, 엔터프라이즈 시장에는 수백 종의 에이전트 제품이 범람하기 시작했지요.
문제는 여기서 생겼습니다. 서로 다른 회사가 만든 에이전트들이 서로 말을 섞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한 회사는 MCP를 쓰고, 다른 회사는 자사 API만 고집하고, 또 다른 회사는 A2A를 지지하면서도 일부 기능은 폐쇄적으로 두었습니다. 2025년 가을을 지나면서 많은 기업 고객들이 비슷한 불만을 토로했지요. "에이전트 하나를 도입했는데, 옆 부서의 에이전트와 연결하려니 또 새로운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리눅스 파운데이션 건물 앞에 놓인 여섯 개의 촛불이 둥글게 배치된 상징적 이미지
이런 시점에 리눅스 파운데이션이 나섰습니다. 리눅스 파운데이션은 이미 쿠버네티스(Kubernetes), 노드(Node).js, 하이퍼레저(Hyperledger) 같은 이 시대의 핵심 오픈소스 프로젝트들이 자라난 토양이지요. 여러 경쟁사를 한 지붕 아래 묶어 공동의 기준을 만들어본 경험이 20년 넘게 축적되어 있습니다. AI 에이전트라는 새 영역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겠다고 선언한 것이 AAIF의 출범입니다.
그리고 이번 출범에서 한 가지 상징적 장면이 있습니다. 앤트로픽이 MCP를 AAIF에 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1년 남짓 만에 사실상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은 프로토콜을, 자사 자산으로 쥐고 있지 않고 재단에 내놓았습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표준은 한 회사가 소유하는 순간 경쟁 회사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오래된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1990년대 초 HTTP와 HTML을 자신이나 CERN의 자산으로 묶지 않고 공개한 결정이 인터넷 시대를 열었지요. 앤트로픽은 MCP가 HTTP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고, 그러려면 공적 재단의 손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기부의 대가로 앤트로픽은 재단 내 영향력과 중립적 운영이라는 명분을 얻었고, 경쟁사들이 MCP를 채택하도록 유도하기에 리눅스 파운데이션이라는 중립 지대만큼 좋은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 여섯 개의 촛불 : 창립사 명단이 말하는 것
창립사 여섯 곳의 조합을 다시 들여다봅시다. 오픈(AI), 앤트로픽,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AWS는 이미 친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Block이 있습니다. Block은 잭 도시(Jack Dorsey)가 이끄는 핀테크 회사로, 이전 이름은 스퀘어(Square)였지요. 왜 핀테크 회사가 AI 에이전트 재단의 창립사에 포함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AI 에이전트의 다음 격전지는 돈이 오가는 거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에이전트가 여행을 예약하고, 쇼핑을 대신하고, 구독을 관리하는 시대가 오면 결제 프로토콜은 기술 스택의 핵심 레이어가 됩니다. Block은 그 레이어에 먼저 깃발을 꽂은 셈이지요. AAIF의 창립사 명단은 AI·클라우드·결제라는 삼각 축이 이미 조합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원탁에 둘러앉은 여섯 개의 촛불 중 하나의 불꽃이 다른 촛불에게 옮겨 붙는 순간
그리고 이 명단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들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메타(Meta)는 창립사에 없습니다. 애플(Apple)도 없고, xAI도 없습니다. 중국의 알리바바(Alibaba), 텐센트(Tencent), 딥씨크(DeepSeek)도 당연히 없습니다. 즉 AAIF는 출범 시점에서 이미 서구 주요 AI 기업 중 일부를 중심으로 한 블록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유엔이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을 중심으로 출발했듯, AI 거버넌스의 상임이사국도 일찌감치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이지요.
▸ 한국 기업에게 AAIF는 어떤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국 기업은 이 연맹에 어떤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요. 현재 창립사 명단에 한국 기업은 없습니다. 앞으로 수백 수천 개의 멤버사가 추가되겠지만, 창립 시점에 테이블에 앉은 나라와 나중에 합류하는 나라 사이의 차이는 제법 큽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일반 회원국의 차이처럼 말이지요.
그렇지만 한 발 물러서 보면, 한국이 이 판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충분히 있습니다. MCP와 A2A 같은 프로토콜은 공개 표준이기 때문에 누구나 구현할 수 있고, 그 위에 한국어·한국 비즈니스 컨텍스트에 최적화된 에이전트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은 여전히 열려 있는 영토입니다. 네이버와 카카오, 통신 3사와 금융지주들이 각자 자사 AI 플랫폼을 만들고 있지만, 그 플랫폼들이 AAIF 표준과 호환되도록 설계하느냐 아니냐는 향후 5년의 경쟁력을 결정할 선택입니다.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표준의 정치는 기술의 정치를 앞선다는 사실입니다. 1980년대 일본이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에 막대한 예산을 쏟고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기술 자체보다 미국 주도의 표준 생태계에서 고립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면, 창립사가 되지 못한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표준 위원회의 안쪽 자리를 확보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 연맹의 위험 : 카르텔이 될 가능성
마지막으로 이 출범의 그림자도 짚고 가야 합니다. 경쟁사들이 한 재단에 모이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동기가 생깁니다. 기술 표준을 조율한다는 명분 아래, 신규 진입자에게 불리한 요구 사항을 표준에 끼워 넣는다거나, 특정 회원사의 특허가 핵심 조항에 녹아들어 사후에 라이선스 비용을 챙기는 식의 움직임이 역사적으로 적잖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MP3 표준화 과정에서 일부 특허권자들이 뒤늦게 로열티를 요구했던 사례가 대표적이지요.
AAIF가 그런 카르텔이 되느냐, 아니면 진짜 오픈 생태계의 기반이 되느냐는 앞으로 운영 거버넌스의 투명성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회사 누구가 어떤 워킹그룹의 의장을 맡는지, 표준 제안이 어떤 절차로 통과되는지, 기부된 자산의 지적재산권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같은 세부 사항들이 연맹의 성격을 결정할 것입니다. 기술 기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지요.
기술의 역사는 늘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위기가 협력을 낳고, 협력은 규약을 낳고, 규약은 다음 시대의 질서를 만든다고요. 2025년 12월의 AAIF 출범은, 그 규약이 지금 이 순간 쓰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여러분이 일하시는 조직은 지금 어느 자리에서 이 규약의 첫 페이지를 지켜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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