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8월의 어느 날, 넷스케이프(Netscape)가 상장했습니다. 상장 첫날 주가는 28달러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75달러를 찍었지요. 매출이 변변치 않은 회사가 하루 만에 시가총액 2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은 "인터넷이 새 산업혁명을 시작했다"고 썼고, 투자자들은 '.com'이라는 글자 세 개가 붙은 회사라면 어디든 돈을 쏟았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1999년의 광적인 폭등, 2000년 3월의 정점, 2001년의 대붕괴. 수천 개의 닷컴 회사들이 사라졌고, Pets.com의 양말 인형은 기술 버블의 상징이 되었지요.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건 그 이후입니다. 버블이 꺼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 웹이라는 기술이 제대로 돈을 벌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구글은 2004년에 상장했고, 페이스북은 2004년에 설립되었으며, 아마존은 2001년의 밑바닥에서 다시 올라와 오늘의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하이프는 자본을 끌어모으지만, 자본을 기업의 가치로 바꾸는 것은 하이프가 꺼진 뒤의 실용주의였습니다.
2026년 1월 2일, 테크크런치(TechCrunch)는 이 문장을 그대로 기사 제목으로 썼습니다. "In 2026, AI will move from hype to pragmatism." 이어서 MIT 테크놀로지 리뷰(MIT Technology) Review도 1월 5일자 기사에서 비슷한 관점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두 매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요. 지난 3년간 쌓인 놀라운 것들이 이제는 '놀랍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 29일째 밤의 풍경
저는 이 시점에 연꽃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싶습니다. 호수에 연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연꽃의 면적이 매일 두 배씩 늘어난다면, 30일째에 호수 전체가 뒤덮인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호수의 절반이 뒤덮이는 것은 언제일까요. 답은 29일째입니다. 마지막 하루에 전체의 절반이 뒤덮이는 것이지요.
지난 3년간 AI 업계는 그 29일째 밤을 달려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22년 11월의 챗(GPTChatGPT) 공개, 2023년의 GPT-4, 2024년의 GPT-4o와 클로드 3.5 소네트(Claude) 3.5 Sonnet, 2025년의 GPT-5와 딥씨크(DeepSeek) 쇼크, 그리고 2025년 말에 쏟아진 제미나이(Gemini) 3, 클로드 오퍼스(Claude Opus) 4.5, GPT-5.2까지. 매달 놀라운 소식이 쏟아졌고, 우리는 그 속도에 숨을 고를 틈이 없었습니다.
!새벽 여명의 창문 앞에 놓인 빈 책상, 그 위에 한 잔의 물과 연필 하나
그런데 새 해가 밝으면서 업계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새 모델이 나오고 있지만, 기자들의 관심은 "얼마나 똑똑해졌는가"에서 "실제로 무엇을 바꾸었는가"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테크크런치가 말한 '프래그머티즘'은 바로 그 변화를 가리킵니다. 숫자의 경쟁에서 가치의 경쟁으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태어난 실용주의 철학 사조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존 듀이(John Dewey)가 대표 주자이지요. 이들이 강조한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관념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실제 삶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로 판단한다." 이론이 아니라 효용, 담론이 아니라 변화가 기준입니다. 이 철학이 2026년의 AI 업계에 다시 소환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난 3년간 우리가 들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가능성의 언어 — "AI가 할 수 있다", "AI가 할 것이다" — 였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들은 시험대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2025년 하반기부터 대기업들의 AI 도입 프로젝트 성과가 집계되기 시작했고, 맥킨지(McKinsey)·가트너(Gartner)·보스턴컨설팅(Boston Consulting)에서 "AI 투자와 실제 수익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는 리포트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2026년은 이 간극을 메우는 해가 될 것이고, 어느 쪽이 더 많을지가 핵심 질문입니다.
▸ 30일째 아침에 살아남는 기업의 조건
닷컴 버블 뒤에 살아남은 회사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봅니다. 아마존, 구글, 이베이(eBay), 넷플릭스(Netflix) 같은 이름들이지요. 이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고객의 실제 문제를 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마존은 책을 더 싸고 빠르게 팔았고, 구글은 정보를 더 잘 찾아주었으며, 이베이는 개인 간 거래의 중개 비용을 낮췄습니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라 문제가 먼저였지요. 둘째, 수익 구조가 분명했습니다. 광고, 판매 수수료, 구독 같은 명료한 매출 모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하이프가 꺼져도 유저가 남는 서비스였습니다. 주가는 폭락해도 사람들은 계속 그 사이트에 들어왔지요.
2026년의 AI 기업들이 통과해야 할 시험도 같습니다. 멀티모달 벤치마크에서 몇 퍼센트를 찍었는가보다, 이 제품이 없으면 진짜로 불편한 사용자가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MAU(월간 활성 사용자)보다 DAU(일간 활성 사용자)가, DAU보다 유료 전환율과 이탈률이 핵심 지표로 올라섭니다. 멋진 데모를 만들어내는 기술력이 아니라, 지루하지만 반복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 제품력이 결국 판도를 가릅니다.
!식은 커피잔 옆에 정돈된 서류 더미와 연필, 하루의 일이 막 시작되는 고요한 작업 공간
▸ 한국 기업의 2026년 숙제
저는 이 전환의 시점에 한국 기업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봅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 기업은 파운데이션 모델 경쟁에서 미국·중국에 비해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파라미터 규모, 학습 데이터, GPU 확보 어느 면에서도 따라가기 버거운 싸움이지요. 하지만 2026년의 경쟁이 모델 경쟁에서 적용 경쟁으로 이동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제조업, 금융, 의료, 공공 서비스 같은 수직적 도메인에서의 문제 해결 능력은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이 해외에서 가진 강점이 아닙니다. 한국의 산업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기업이, 글로벌 파운데이션 모델을 가져다 그 위에 도메인 솔루션을 얹는 조합이 가장 현실적인 승자 모델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이 전략이 통하려면 기업 내부에 AI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의 수가 충분해야 합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한국 기업들 상당수가 외부 벤더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AI를 도입했는데, 이 방식은 초기에는 빠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비용 중심 구조로 이어집니다. AI를 자산으로 바꾸려면 내부에 그 기술을 이해하는 인력이 쌓여야 하지요.
▸ 이 해에 던져야 할 세 가지 질문
마지막으로 한 해를 여는 이 시점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첫째, 여러분의 조직이 지난 2~3년간 쓴 AI 예산의 몇 퍼센트가 실제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었습니까. 그 숫자가 10%를 넘지 않는다면, 2026년은 새 모델을 더 도입하는 해가 아니라 이미 도입한 것을 제대로 소화하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여러분이 개인 사용자라면 챗GPT든 클로드(Claude)든 제미나이든, 지난 한 달 동안 어떤 질문에 가장 유용한 답을 얻으셨는지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질문을 잘 던지는 습관이, 앞으로 몇 년간 여러분의 일하는 방식을 바꿀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의 주변에 아직 AI를 전혀 쓰지 않는 동료가 있다면, 그분이 왜 쓰지 않는지를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2026년의 격차는 AI를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가장 크게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29일째의 밤은 길었지만, 이제 30일째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호수는 이미 절반이 뒤덮였고, 나머지 절반은 오늘부터 하루 만에 덮일 것입니다. 이 속도를 견뎌낼 수 있는 조직과 개인이 누구인지, 2026년의 끝에서 판가름이 나겠지요. 저는 그 판단의 기준이 기술의 이해가 아니라 문제를 올바로 던지는 능력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AI가 답을 주는 시대에, 질문하는 인간만이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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